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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사람을 살립니다.

풀꽃 시인의 등장

2022년 여름.

밤은 길었고, 아침은 두려웠다.
하루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침대 가장자리에 오래 앉아 있곤 했다.

그때 내 곁에 있던 건 시집 두 권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나는 그 책을 가슴 위에 얹었다.

시 한 편이 숨이 되었고,
한 문장이 하루를 대신 걸어가 주었다.

시를 품고 사는 사람은
적어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던 시절.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시집 표지에 적혀 있던 이름 석 자.
그 시인이 이곳 애틀랜타에서 강연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국민 시인’ 나태주 선생님은
잔뜩 움츠린 채 어둠 속에 머물던 내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첫 만남

몹시 더웠던 8월.

푸른 계열의 플랫캡을 눌러쓰신 선생님은
한인회관에 모인 백여 명의 청중을 향해 말씀하셨다.

“시인은 우울증 치료제 같은 시를 써야 합니다.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가서 손수건이 되고,
꽃다발이 되는 시.
짧고, 쉽고, 단순하지만 강력한 시 말이죠.”

강연이 끝난 뒤, 작은 사무실에서 선생님을 마주했다.
시골 학교 교장 선생님 같기도,
오래 알고 지낸 어른 같기도 했다.

학교 운동장을 스치는 바람처럼 편안한 미소.
장난꾸러기 소년의 눈빛도 반짝였다.


사랑은 나이를 먹는다

“젊을 적엔 예쁜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병이 있었지요.”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긴 세월이 있었다.
곁에서 함께 견뎌 온 아내의 시간이 겹쳐 보였다.

미국에 더 머물고 싶지만
한국에 홀로 있는 아내가 걱정돼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나이가 드니 서로 건강을 챙기는 게 가장 큰 일상입니다.”

그의 시가
여인에서 딸로, 아내로,
세상의 모든 딸로 넓어져 온 이유를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젊음의 설렘도 사랑이지만
시간을 통과하며 깊어지는 책임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른 시인

“시인으로 사는 삶은 불편하고,
때로는 비극적이며 이중적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사랑을 쓰려고 합니다.”

그는 시인을 활화산에 비유했다.
쉬지 않고, 늘 현역으로 시를 쏟아내야 한다고.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말을 건넸다.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 사랑해야 한다고.

어른이 희미해진 시대에도
여전히 사랑을 말하는 어른이 계셨다.

다행이었다.


제 이름 기억해 주세요

인터뷰 말미에, 선생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시인이나 기자나, 글을 쓰는 사람은 관찰을 해야 합니다.
사물과 자연, 사람의 마음을 오래 바라보면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그날 이후 일기장에 문장을 끄적이는 습관이 생겼다.
시라 부르기엔 어설펐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떠나시기 직전,
나도 모르게 간절한 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선생님, 제 이름 기억해 주세요.
꼭 다시 찾아뵐게요.”

선생님은 내 눈을 잠시 바라보시더니,
시집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첫 장에
천천히 글을 적어 내려가셨다.

“이승은 님,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펜 끝이 종이를 스치는 동안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애써 삼켰다.

아마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바라봐 주는 어른 한 분이 있으면
살 것 같았나 보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최근 선생님이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하신 영상을 보았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을 잘 지켜 주십시오.”

부담스러워하는 진행자에게
선생님은 자신의 시를 들려주셨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이 작은 일이 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는 감동했고, 제작진은 울었다.
영상을 보던 나처럼.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대한 구호가 아니라
마당을 쓸고,
꽃 한 송이를 바라보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풀꽃처럼 다시 일어서다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이제야 글로 올린다.
네 해가 지났다.

그만큼 내가 단단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은 안다.
그 여름이 나를 무너뜨린 시간이 아니라
붙들어 세운 시간이었음을.

선생님을 만난 뒤로
나는 길가의 작은 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름 없는 풀꽃 하나에도
걸음을 멈춘다.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말을 건넨다.

너 참 예쁘다.
너 참 사랑스럽다.

말이 오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내 세상이 먼저 환해진다.

풀꽃 시인 나태주 선생님과 이승은 기자

* 최욱의 매불쇼(나태주 선생님 영상)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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