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이 있다.
1960년 의정부에서 흑인 혼혈로 태어나, 열세 살에 미국으로 입양된 소녀. 그녀에게는 선택권이라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도 밝고 따뜻한 영혼을 지닌 그녀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
윤미 햄튼. 귀넷 카운티 16개 도시 가운데 최초의 아시안 시의원이자, 릴번시 최초의 아프리카계 시의원.
이 한 줄의 이력만으로는 이 여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마주친 사람이라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매력과 아우라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질 테니까.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해 보자.
양반의 손녀, 의정부에서 태어나다
기자: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셨어요?
윤미 햄튼: 우리 할아버지 집안은 북에서 내려온 양반 집안이었어. 평양 쪽에서 부자로 사셨대. 집에 식모도 두고, 갓 쓰고 점잖게 앉아 헛기침하시던 그런 분. 그런데 전쟁이 다 가져갔어. 피난 내려오면서 가진 걸 전부 잃으셨거든. 할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술독에 빠지셨지.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일은 장녀인 우리 엄마 몫이 됐어.
전쟁이 끝나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젊은 여자에게 선택지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엄마하고 이모는 그 시절 여자치고는 드물게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야. 배운 게 있었지. 엄마는 영어도 조금 하셔서, 동네에서 국제결혼하는 사람들 편지도 대신 써 주고 그랬어.

나는 1960년에 의정부에서 태어났어. 이모하고 할머니하고 엄마, 이렇게 셋이 나를 키웠어. 흑인 혼혈인 나를 키우는 게 그 시절에 쉬운 일이었겠어? 그래도 우리 엄마는 나를 쪽쪽 빨면서 키웠어. 사랑, 정말 많이 받았지.
사진관에서 사라진 남자
기자: 친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으세요?
윤미 햄튼: 이 사진 좀 봐. 흑백이라 그렇지, 원래는 색이 다 있었어. 빨간 구두에, 청색 옷에, 흰 바탕에 빨간 줄… 1964년이니까 내가 너댓 살밖에 안 됐을 때야.
그때 어떤 흑인 군인 아저씨가 있었어. 몸이 좀 편찮으셨던 것 같아. 그래도 나한테 어찌나 잘해 주던지. 어디 갈 때마다 나를 꼭 안고 다니거나 데리고 다니셨어. 나는 그분이 우리 아버지인 줄도 몰랐어.
그분이 떠나던 날이었나 봐.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오셨더라고. 어찌나 멋있던지.
엄마가 “윤미야, 시내 가서 같이 사진 찍자.” 하셔서 셋이 사진관에 갔어. 그분하고 나하고 찍고, 엄마까지 셋이 찍고, 또 엄마하고 나하고 찍고. 그러다 마지막에 엄마가 그러시는 거야. “윤미야, 이제 마지막은 너야. 네 거니까 너 혼자 서서 찍어.”
뭔가 이상했어. 나도 모르게 자꾸 그분 쪽을 돌아보게 되더라고. 사진사 아저씨도 괜히 천천히 찍고. 어린 마음에도 ‘지금 뭐 하는 거지?’ 싶어서 억지로 웃으며 찍었어. 그렇게 찍고 돌아보니까, 그 남자가 사라진 거야. 다시는 못 봤어.

엄마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흑인 혼혈로 태어난 딸이 한국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 마지막 사진은 떠나는 아버지가 딸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얼굴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이 ‘찰스 버나드 화이트(Charles Bernard White)’였다는 사실을 윤미 햄튼은 그로부터 반세기도 더 지난 뒤에야 알게 된다.
“윤미야, 정직해야 돼”
기자: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윤미 햄튼: 우리 엄마는 마음이 참 고운 사람이었어.
한 번은 동네 아이들이 거지한테 마른 새똥을 떡이라고 주면서 놀리더라고. 내가 그걸 탁 쳐서 버렸어. 그러고 그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니까, 우리 엄마가 상을 차리는 거야. 화장실보다 더 냄새 나는 사람이었는데도, 장작불에 밥을 데워서 숟가락 젓가락 다 놓고 대접을 했어. 그런 엄마였어.
그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가, 나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게 됐어. 예쁜 신발 사 주면 구멍 난 신발 신은 친구한테 벗어 주고, 나는 그 구멍 난 거 신고 오고. 미군 부대에서 연필 받아 오면 다 나눠 주고. 엄마가 늘 하신 말씀이 있어. “윤미야, 아무도 안 봐도 하나님은 너를 보고 계셔. 그러니 정직해야 돼. 그리고 사람들을 많이 도와야 해.”

Courtesy of Yoonmi Hampton.
한 번은 내가 배가 아파서 학교를 안 가겠다고 했어. 이모가 꾀병인 줄 알고 억지로 끌고 가다가 내 엉덩이를 때렸어. 태어나서 처음 맞아 봤어. 동두천에 일하러 가신 엄마한테 일렀더니, 나중에 엄마가 이모한테 화를 내시면서 그러셨어. “얘가 아프다면 아픈 거야. 이 아이는 거짓말을 안 해. 다시는 손대지 마.”
그 뿌리 덕분에 나는 옳고 그른 걸 분별하게 됐어. 그 어린 시절이 없었으면, 나도 모르게 아주 다른 사람이 됐을지도 몰라.
그날 저녁 밥상
기자: 어머니를 어떻게 떠나보내셨어요?
윤미 햄튼: 엄마는 나를 살리려고 동두천에서 일하셨어. 군부대에서 보이프렌드를 만나서, 어떻게든 내 아버지가 되어 줄 사람을 찾으려고. 나를 미국에 데려가 줄 사람을. 인종차별 없이 살게 해 줄 사람을. 그게 다 나 때문이었어. 자기를 희생한 거지.
내가 아홉 살, 열 살쯤 됐을 때였어. 저녁을 먹는데 엄마가 갑자기 “억!” 하시더라고. 이모도 놀라고 나도 놀랐는데, 물이 확 쏟아지길래 나는 내가 오줌을 싼 줄 알았어. “엄마, 나 오줌 쌌어” 했더니 이모가 황급히 치우시더라고.
엄마는 임신 중이셨어.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오시더니 나를 꼭 안고 뽀뽀해 주시더라고. “윤미야, 엄마 병원 갔다 올게. 잘 있어야 해.”
그게 마지막이었어. 우리 집이 동네 맨 끝이라, 행길까지 한참을 걸어 나가야 했어. 엄마하고 이모가 걸어가는 걸 봤는데, 미치도록 엄마가 안 돌아오더라고.
그렇게 며칠 뒤. 나도 모르게 엄마 방에 들어가 엄마 가운을 입고 잠들었는데, 이모가 흔들어 깨우는 거야. 어떤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봤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어. “하나님, 우리 엄마 죽지 않게 해 주세요.” 그 순간 저쪽에서 “와아악!” 소리가 났어.
택시기사 아저씨가 캄캄한 밤길에 엄마를 업고 오셨대. 병원에서 더 손 쓸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오신 거였어. 오는 내내 엄마가 그러셨대. “나 죽으면 안 돼. 우리 윤미 때문에 나 죽으면 안 돼. 나 살아야 돼!” 그게 마지막 말씀이셨다는 거야.
나중에 간호 일을 하면서 알았어. 아기가 뱃속에서 먼저 죽는 바람에 패혈증이 온 거였더라고. 감염이 온몸으로 퍼진 거지. ‘아, 그래서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구나.’
고아원, 그리고 기도
기자: 어머니가 떠나신 뒤, 어떻게 되셨어요?
윤미 햄튼: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다 무너졌어. 학교 갔다 오니까 삼촌이 집을 빼앗고 이모를 내쫓았더라고. 원래도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엄마가 없으니까 나한테까지 손을 대려고 했어.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삼촌에게 대들었어. “엄마 있으면 너 나 안 때리지!” 하면서. 엄마가 있었다면 그 사람이 감히 나를 못 건드렸을 텐데.
이모가 나를 데리고 가면서 그랬어. “윤미야, 너 고아원에 가는 게 어때? 그러면 누가 입양해서 미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를 고아원에 맡겼어. 이모도 나를 키울 형편이 안 됐으니까.
다행히 고아원이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있어서, 학교 끝나면 할머니한테 가서 자기도 하고 이모도 보고 그랬어. 고아원엔 통행금지가 있어서 어기면 매를 맞았는데, 원장님이 나를 어찌나 예뻐하시던지 그것도 다 눈감아 주셨어. 입양이 안 되면 당신이 직접 나를 키우겠다고까지 하셨던 분이야.
고아원에 한 2년쯤 있었어. 그 시절 나한텐 하나님밖에 없었어. 혼자 하나님하고 대화를 했어. “하나님, 제발 아버지를 보내 주셔서 저 미국 가게 해 주세요.”
한밤중 원장실의 그 사람
기자: 양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윤미 햄튼: 우리 양아버지는 미 육군 상사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다 치르고 은퇴하신 분이야. 이름은 네이선 버틀러(Nathan Butler). 군에서 나온 뒤엔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일하면서 한국에 남으셨어. 극심한 인종차별과 린치가 두려워서 미국으로 돌아가기 싫으셨다고 해.
평소에 입양에 관심이 있으셨던 아버지가 하루는 부산에서 미군들끼리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더니, 누가 그러더래. “의정부 한 고아원에 혼혈 여자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를 입양하면 어떻겠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강하던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 길로 의정부까지 달려오셨대.
그날 밤 부원장님이 자고 있던 나를 깨워서 원장실로 가 보라고 했어. 눈을 비비며 문을 여니까, 체격 좋은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는 거야.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어. 그 순간 속으로 ‘아, 저분이 우리 아버지인가?’ 했어. 그분은 말없이 미소만 지으며 나를 보셨고, 원장님이 찡긋 웃으시더니 “윤미야, 이제 방에 가서 자.” 하셨어.
아침에 깨니까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더라고. 괜히 기분이 울적해서 고아원 건물 뒤에 쪼그려 앉아 있었어. 원장님이 다가오셔서 “왜 그러냐?” 물으시길래 “아빠가 데리러 오는 꿈을 꿨어요” 했더니, “윤미야, 꿈이 아니란다. 그분이 너의 아빠가 되실 거야. 곧 너를 데리러 오실 거고, 미국으로 데려가실 거야.”
얼마나 기쁘던지 벌떡 일어나 펄쩍펄쩍 뛰며 환호성을 질렀어.
그렇게 1973년, 열세 살에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왔어.

Courtesy of Yoonmi Hampton.
사랑한 아버지, 미워한 새엄마
기자: 그렇게 바라던 미국이었는데, 어땠어요?
윤미 햄튼: 미국 생활은 한마디로 설명이 안 돼. 나를 끔찍이 아낀 아버지와 나를 원하지 않은 새엄마. 그 둘 사이에서 살아야 했거든. 새엄마는 한국 분이셨는데, 처음부터 내 입양을 원하지 않으셨어. 한국에서 그렇게 사랑만 받고 자란 내가, 미국에 와서는 정반대의 시간을 겪어야 했지. 공부는 해서 뭐 하냐며 내 대학 진학까지 반대하셨으니까. 그 시절 하도 맞아서 지금까지도 등에 남은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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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일을 따라 우리는 여기저기 옮겨 다녔어. 1975년부터 2년 동안은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서 살았어. 아버지가 송유관 공사 일을 하셨거든. 1977년엔 회사가 한국 여수에서 일을 맡아서 다시 한국으로 갔고, 1978년에 거기 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꾼 일은 1979년에 일어났어. 캘리포니아 코로나 델 마 해변 모래밭을 걷는데, 무언가 강한 힘이 나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거야. 홀린 듯이 무릎을 꿇고 모래를 파헤쳤어. 그랬더니 손에 딱딱한 게 잡혀. 오래된 나무판이었어. 처음 보는 문구가 적혀 있더라고. 집에 가져가서 아버지께 보여 드렸더니, 아버지가 성경에서 그 구절을 찾아 펼쳐 보이시며 그러셨어. “이건 하나님이 너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잠언 3장 6절이었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your pa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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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나는 그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했어. 새엄마 밑에서 그렇게 힘들었어도, 아버지가 늘 내 편이 되어 주셨지. 그 지지 덕분에 칼리지에 진학할 수 있었고, 폭력이 난무했던 끔찍한 집에서 독립도 했어. 1983년에 산타애나 칼리지에서 간호학위를 받고 면허 간호사(LVN)가 됐어.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
기자: 양아버지와는 각별하셨네요.
윤미 햄튼: 원래는 정식 간호사(RN) 과정까지 가려고 했어. 그런데 아버지가 심장마비 증세가 오시는 거야. 공부는 미뤘어. 아버지 곁에 있어야 했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캘리포니아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서브웨이(Subway) 사장님이셨어. 1980년대 초였지. 나는 그 가게를 8년 동안 매니지하면서 아버지를 도왔어. 결국 RN 간호사는 못 됐지만, 그 시간은 아버지와 나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 매일 밤 전화로 “사랑해요, 굿나잇.” 인사를 드렸고, 주일마다 함께 교회에 갔어. 그러다 내 결혼식을 9개월 남겨둔 1992년 어느 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저녁에 통화를 했어. “사랑해요, 아빠.” 그러고 끊었어. 그런데 몇 시간 뒤에 아버지한테서 다시 전화가 온 거야. 몸이 춥고 좀 이상하다고 하셔서 전화 끊자마자 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쓰러져 계셨어. 간호학교에서 배운 심폐소생술을 그날 아버지에게 처음 해 봤어. 내 손으로.
아버지는 결국 병원에서 천국으로 가셨어. 너무 슬펐지. 그래도 후회는 없었어. 매일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으니까. 마지막 그날까지도. 그래서 나는 사람들한테 늘 말해. 가족들, 특히 자녀들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아무도 모르잖아.
네이선 버틀러는 입양딸에게 뿌리를 찾아 주려 평생 애쓴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 한국으로 건너가, 이미 사라져 버린 윤미의 고아원을 수소문했다. 끝내 당시 부원장을 찾아내, 윤미의 어린 시절 사진과 서류를 받아 왔다. 1970년 무렵의 일이다. 그가 한국에서 찾아온 그 사진들이, 지금도 윤미 햄튼이 자기 뿌리를 확인하는 단 하나의 증거로 남아 있다.

Courtesy of Yoonmi Hampton.
프린스 차밍
기자: 남편 제임스 씨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윤미 햄튼: 1991년 5월, 매사추세츠 브록턴 친구 결혼식에서 만났어. 그이는 신랑 들러리, 나는 신부 들러리였지. 그날 그이가 나한테 프로포즈를 했어. 서로 난생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그해 9월, 우리 첫 데이트는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였어. 제임스는 조지아에 살았고 나는 캘리포니아에 살았으니, 멀리서 오가는 사랑이었지. 2년을 만나고 1993년 5월, 캘리포니아 산타애나에서 나의 프린스 차밍(Prince Charming)과 결혼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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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나는 정든 캘리포니아를 떠났어. 나를 끔찍이 여겨 주던 친구들, 언니들이 다 거기 있었는데.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제임스가 있는 조지아로 왔어. 돌아보면 그 해변에서 주운 성경 말씀이 꼭 나한테 맞게 주신 거였다고 믿어.
사실 나는 결혼 내내 임신이 두려웠어. 우리 엄마가 아기 낳다가 돌아가셨잖아. 나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 그렇게 8년이 흐른 뒤에, 선물처럼 딸이 태어났어. 이름은 자스민. 우리 딸 자스민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위해 미리 정해 두신 계획의 증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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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대신, 부르심
기자: 조지아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윤미 햄튼: 조지아에 오자마자 도라빌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오피스에 취직했어.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자리였지. 그런데 처음부터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았어. 하나님이 자꾸 내 마음에 다른 걸 넣어 주시는 거야. 사람들을 도우라고. 그게 네 일이라고.
그래서 나는 정해진 직업을 갖는 대신, 내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업으로 삼기로 했어. 넉넉했냐고? 아니. 그래도 그런 걱정은 안 했어.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사람들을 돕는 일, 거기에만 마음을 뒀어.

사실 이 마음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어. 캘리포니아에 살던 1980년에 세인트 제임스 선교 침례교회 식구가 됐는데, 거기서 내가 ‘케시 특수 아동 합창단(Kessee’s Special Children Choir)’을 만들어 13년 넘게 이끌었어. 몸이 불편한 아이들이 노래하는 합창단이었지.
조지아에 와서는 제임스와 스톤마운틴의 메트로 월드 교회에 다녔어. 거기서도 아이들과 함께 ‘코이 바커 천사 합창단(Coy Barker’s Angelic Choir)’을 만들어 10년 가까이 이끌었어. 내가 아이들을 그렇게나 예뻐한다니까.
딸 자스민이 태어나고 4년쯤 됐을 때, 극심한 편두통이 와서 그 일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어.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아팠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나는 아픈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왔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내가 가진 걸 다 내어줘. 언제나 하나님 중심(God-centered)으로 살고자 해.
잃어버린 동생을 찾다
기자: 뿌리를 찾는 일은 계속됐지요?
윤미 햄튼: 2017년에 온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 한국에 다녀왔어. 나한테는 큰 축복 같은 여행이었지.
그리고 2019년, DNA 검사를 통해 동생을 만났어. 이름은 데니스. 우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찰스 버나드 화이트를 함께 둔 남매야. 어머니는 서로 달라. 데니스는 하와이에서 독일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거든. 58년이야. 58년 동안 우리는 서로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어. 그러다 서로를 찾았으니,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이야.

Courtesy of Yoonmi Hampton.
같은 해, 나는 하파 가족들과 함께 ‘모국 투어’로 한국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어. ‘하파(HAPA)’는 한인 혼혈인과 다인종 커뮤니티야. 2020년에 ‘하파 네이션 원’이라는 단체가 세워졌고, LA 시의회와 협력해서 매년 5월 19일을 공식 ‘하파 데이’로 만들었어.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서로를 안아 주는 거야. 평생 ‘아이노코’라고, 혼혈이라고 놀림받던 아이가 이제는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비로소 집을 찾은 셈이지.

Courtesy of Yoonmi Hampton.
릴번의 손과 발
기자: 어떻게 시의원에 출마하게 되셨어요?
윤미 햄튼: 나는 정치엔 관심이 손톱만큼도 없었어.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런데 하루는 차가 고장 나서 정비소에 갔는데, 거기서 한인 한 분을 우연히 만난 거야. 번역 일을 부탁하셔서 조금 도와드렸더니 그분이 그러는 거야. “이렇게 한국말도 영어도 다 하는 사람이 시의원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겠어요.”
처음엔 웃어넘겼어. 정치라곤 해 본 적도 없고, 선거 캠페인을 굴릴 자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자꾸 권유를 하셔서 기도했어. “하나님, 정말 제가 이 일을 해야 한다면 저 혼자 단독으로 출마하게 해 주세요.” 돈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니, 경쟁자 없이 나가게 해 달라고 한 거야.
그 기도가 그대로 이뤄졌어. 나는 단독 출마로, 2021년에 릴번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의원이 됐어. 16개 도시가 있는 귀넷 카운티에서도 최초의 아시안 시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Courtesy of Yoonmi Hampton.
내가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여기 한인이 얼마 없었어. 지금은 한인이 많아져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2년 동안 나는 릴번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려고 했어. 거창한 거 아니야. 홀로 사는 시니어들 집에 찾아가 전구를 갈아 드리고,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목욕도 시켜 드리는 그런 일들.
내가 어린 시절 의정부에서 배운 게 그거였거든. “도봉산 맑은 물에… 여기는 의정부, 평화의 나라. 서로 돕고 도와 가며…” 어릴 때 부르던 교가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어. 서로 돕고 도와 가며… 그게 나야.
2023년 선거에서는 아쉽게 졌어. 딱 100표 차로. 재선엔 실패했지만, 괜찮아.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사람을 돕는 일은 어차피 내가 평생 해 온 일이니까.
“나쁜 것 말고, 좋은 것을 봐”
기자: 사람들을 돕다 보면 상처받는 일도 있으셨을 텐데요.
윤미 햄튼: 응. 많이 받았지. 한 번은 이웃에 사시는 파키스탄 할머니를 6년간 돌봐 드린 적이 있어. 눈이 안 보이는 분이었거든. 음식부터 온갖 서류 관련 일들까지. 변호사를 썼으면 수만 불 들었을 일을 다 해 드렸지. 의사들이 다 나한테 고맙다고 했을 정도야. 그런데 이웃들이 할머니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내가 할머니 집을 빼앗으려 한다고. 어이없게도 할머니는 그 말을 믿고 나를 몰아냈어.
그 일 이후 나를 모함한 이웃 가족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나도 모르게 속에서 불이 났어. 그래서 기도했지. “하나님, 저 죄 짓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저 사람들 볼 때마다 화가 나요. 이건 크리스천의 길이 아니잖아요. 도와주세요. 저들을 용서하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세상에, 며칠 뒤 갑자기 그들이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거야. 할렐루야!
결국 이사 가기 전에 그 이웃을 찾아가서 말했어. “당신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안아 봐도 돼요?” 하길래, 안아 줬어. 그러고 끝냈지.
나보고 바보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게 따귀를 맞고도 또 도와주냐고. 그런데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걸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셨잖아. 못되게 한 사람을 보지 말고, 나한테 귀하게 해 준 사람을 봐야 해. 나쁜 것을 보지 말고 좋은 것을 봐. (Don’t look at the bad, look at the good.)
나는 이 세상을 언제 떠날지 몰라. 그래서 바른 일을 하며 살아야 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하게 말이야.

윤미 햄튼의 삶에는 이별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을 받지 못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와 이모, 할머니가, 고아원 원장과 선생님들이, 바다 건너의 아버지가 그녀를 사랑했다. 남편 제임스는 삼십 년이 지나도록 그녀를 뜨겁게 사랑하며, 그녀가 가는 길마다 곁을 지킨다. 그녀는 여전히 주변을 환히 밝히는 촛불이다. 무엇보다, 더 크신 이의 사랑 안에서 지금도 듬뿍 사랑받으며 산다. 받은 사랑이 많아 그런지,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먼저 놓은 적이 없다.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면 그분이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던 모래밭의 그 한 구절을 붙들고서.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윤미 햄튼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글. 이승은 (Eunice Lee) / InnerView. No.21 2026년 6월 2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