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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틴스의 밤, 미국이 갈라졌다

두 도시, 하나의 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그런 날 중 하나였다.

1936년 6월 19일 금요일 아침, 5만 명이 넘는 흑인 방문객이 텍사스 댈러스 페어 파크로 몰려들었다. 그달 막 개막한 세계박람회, 텍사스 100주년 엑스포의 특별 준틴스(Juneteenth)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세 열차와 버스가 줄지어 도착했다. 캡 캘로웨이¹의 연주가 울렸고, 화가 아론 더글러스²의 작품이 전시됐고, 흑인 귀빈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노예 해방의 날, 그해 가장 큰 흑인들의 축제였다.

그리고 저녁 8시, 수천 명이 제너럴 모터스 강당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이번엔 음악도 그림도 아니었다. 라디오 한 대였다.

1,000마일 떨어진 뉴욕 브롱스 양키 스타디움. 전 좌석이 매진됐다. 같은 시각 7,000만 명이 전국에서 같은 주파수에 귀를 맞췄다. 링 위에는 당시 22세로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가 서 있었다. 반대편에는 한때 세계 챔피언이었던 30세의 독일인 막스 슈멜링이 마주 서 있었다. 배당률은 10대 1, 루이스의 압도적 우세였다.

Photo: Joe Louis vs. Max Schmeling, June 19, 1936. / Wikipedia

댈러스의 강당에 모인 사람들도, 뉴욕의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관중들도, 그날 밤 라디오 앞에 모여든 미국 전역의 흑인들도 모두가 같은 채널을 틀어 놓고 있었다. 노예 해방 71주년의 밤, 그들이 듣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의 이름이었다.

1. 캡 캘로웨이(1907~1994) –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한 흑인 재즈 빅밴드 리더 2. 아론 더글러스(1899~1979) – ‘흑인 미국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할렘 르네상스 화가.


위태로운 여름

그해 여름, 세계는 이미 위태로웠다. 대공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고, 스페인에서는 내전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나치는 막 수용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히틀러의 아리안³ 우월주의에 대한 경고가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었고, 많은 흑인 미국인은 그 세계관이 미국 남부의 인종 위계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해외의 나치 돌격대와 국내의 KKK, 양쪽 모두에 대한 반격이었다. 루이스의 주먹 하나에 그만큼의 무게가 걸려 있었다.

3. 아리안 – 나치가 금발·푸른 눈의 ‘순수 게르만 혈통’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내세운 인종 개념.


12라운드

슈멜링은 독일에서 루이스가 잽을 던진 후 왼손을 내리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며 철저히 훈련했다. 반면 연이은 시합으로 지쳤거나 슈멜링을 과소평가했던 루이스는 충분히 훈련하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되자 슈멜링은 잽 뒤에 라이트 크로스를 숨겨 꽂아 넣기 시작했다. 4라운드, 날카로운 라이트가 루이스의 턱에 박혔다. 프로 데뷔 28경기 만에 처음으로 그가 캔버스에 쓰러진 순간이었다.

Photo: Joe Louis is counted out following his loss to Max Schmeling, 1936. / Wikipedia

루이스의 펀치가 슈멜링의 눈을 붓게 만든 라운드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루이스의 가드는 무너졌고, 시야는 흐려졌다. 그는 KO를 노리며 계속 펀치를 뻗었지만 명중하지 못했다. 12라운드, 슈멜링의 라이트가 몸통을 파고든 뒤 다시 턱에 꽂혔다. 루이스는 자신의 코너 근처에서 무너졌다. 카운트아웃. 전성기에 당한 첫 KO 패배였다.


한쪽은 울고, 한쪽은 웃었다

흑인 사회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매우 절망적이었다. 랭스턴 휴즈⁴는 그 밤 세븐스 애비뉴를 걸으며 어른들이 아이처럼 우는 것을, 여성들이 연석에 앉아 머리를 손에 묻고 있는 것을 봤다고 적었다. 전국 각지에서 충격으로 사망한 사례까지 보고됐다. 댈러스의 강당에는 음악이 다시 연주됐다. 이번엔 위로를 위한 연주였다.

백인 사회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캡 캘로웨이의 공연을 함께 보던 백인 관객들은 환호했다. 의회 세션은 독일의 승리를 자축하는 의원들 때문에 일시 중단됐다. 유명 칼럼니스트 그랜틀랜드 라이스는 루이스의 “정글의 교활함”이 슈멜링의 지성을 이기지 못했다고 썼다. 일부 신문은 노예해방 기념일과 흑인 선수의 패배를 나란히 놓고 조롱하는 문장을 톱뉴스로 실었다.

4. 랭스턴 휴즈(1901~1967) –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한 흑인 시인.


124초의 설욕

대중이 기억하는 것은 1936년이 아니라 1938년의 재대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두 사람의 주먹다짐은 미국과 독일의 대리전으로 번졌다. 서방 언론은 이 경기를 ‘흑인 대 백인’, ‘자유 대 파시즘’, ‘선 대 악’의 대결로 그렸다. 루이스는 미국에서 자유와 기회의 상징이었고, 히틀러가 독일 민족주의의 화신으로 빚어낸 슈멜링은 그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읽혔다.

Photo: Louis vs. Schmeling, 1938. / Wikipedia

히틀러는 슈멜링에게 “미국 검둥이를 때려눕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라”고 직접 지시했고,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경기 며칠 전 루이스를 백악관으로 불러 함께 식사하며 “당신의 두 팔에 미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번엔 백인과 흑인 미국인 모두가 같은 쪽에서 그를 응원했다. 링 위에서 루이스는 1라운드, 단 124초 만에 슈멜링을 무너뜨렸다. 180도 태도가 바뀐 미국 언론은 ‘사악한 나치’에 맞선 ‘자유의 승리’라며 1면을 도배했다.

Photo: Louis vs. Schmeling,1938 / Wikipedia

두 사람

루이스는 앨라배마에서 태어나 디트로이트에서 자랐다. 1935년, 무솔리니가 총애하던 이탈리아 복서 프리모 카르네라를 꺾으며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키 198cm, 루이스보다 30kg 더 나간 카르네라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선전 도구였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뉴욕의 긴장이 극에 달해 경기 취소까지 거론된 밤, 루이스는 1라운드부터 거인을 무너뜨렸다. 카르네라는 아랫니가 윗입술을 뚫고 나올 정도로 두들겨 맞은 끝에 6라운드에 제압당했다. 24전 무패. 그러나 그 무패를 지키려 두 해 동안 열두 번을 더 싸워 모두 이겨야 했다.

슈멜링은 독일에서 태어나 1930년 잭 샤키와의 경기에서 실격승으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던 인물이다. 1932년 샤키와의 재대결에서 논란이 된 판정으로 타이틀을 잃었고, 1933년에는 유대인 아버지를 둔 맥스 베어에게 패하며 공개적인 굴욕을 당했다. 나치는 그를 아리안 전사로 선전했지만, 양키 스타디움에 서기 전 그는 이미 기울어진 선수로 보였다.

Photo: Joe Louis and Max Schmeling, 1971 / Wikipedia

국가가 두 사람을 인종과 이념의 대리인으로 세웠지만, 이들의 인연은 링 위의 적대로 끝나지 않았다. 1938년의 설욕 이후에도 둘은 종종 마주쳤고, 시간이 흐르며 적수에서 지인으로, 다시 친구로 가까워졌다. 훗날 사업에 실패하고 세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루이스를 슈멜링이 경제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은 두 사람을 아는 이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81년 루이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관을 운구한 사람들 중에는 한때 그를 캔버스에 쓰러뜨렸던 막스 슈멜링이 있었다.


조건부 자유

같은 1936년 여름, 베를린 올림픽에서 제시 오언스⁵는 4관왕에 올랐다. 히틀러는 마지못해 그를 인정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단 한 번도 그를 백악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루이스의 가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미국의 내부 위계질서에 도전할 때, 그는 외면받았다. 그가 미국의 패권을 대신 증명해 줄 때, 그제서야 영웅이 됐다.

제시 오언스 / 위키피디아

다가올 전쟁에서 수많은 흑인 남성이 미국을 위해 싸우러 떠났다. 그들 중 일부는 군복을 입은 채 돌아와, 투표권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고향에서 린치를 당했다. 흑인으로서 이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이 나라가 당신을 위해 싸워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안고 사는 일이었다.

5. 제시 오언스(1913~1980) –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4관왕에 오른 흑인 육상 선수.


Now / What’s Next

늦게 도착한 자유

준틴스는 1865년 6월 19일, 텍사스 갤버스턴에서 시작됐다. 북군 장군 고든 그레인저가 그곳에 도착해 모든 노예가 자유임을 선포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나온 지 2년 반이 지난 뒤였다. 그 선언이 텍사스까지 도달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 그것이 이날의 가장 정직한 진실이다.

오랫동안 준틴스는 흑인 공동체 안에서만 조용히 기념됐다. 미국의 두 번째 독립기념일이라 불리면서도, 연방 공휴일이 되기까지는 156년이 걸렸다. 오팔 리를 비롯한 활동가들의 끈질긴 호소 끝에, 2021년에야 비로소 국가의 달력에 새겨졌다.

Photo: Angie McMonigal / The Obama Presidential Center

지난주 준틴스, 시카고에서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오바마는 개관 연설에서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고 누구도 법의 보호 밖에 놓일 수 없다는 원칙이 민주주의를 지탱한다고 말한 뒤, 마틴 루서 킹이 즐겨 인용했던 한 문장을 다시 꺼냈다.

“도덕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굽어 있다.”

1936년의 양키 스타디움과 댈러스 페어 파크 사이에는 1,000마일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멀었던 거리는 해방의 선언과 해방의 도착 사이에 놓인 시간이었다. 그 거리를 가장 먼저 메운 것은 법이 아니라, 한 청년이 링 위에서 흘린 피였다.


글. 이승은 (Eunice Lee) / Frame. No.21 2026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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