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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은 했어도, 빚지고는 못 산다

애틀랜타의 저녁.

여든여덟의 노인이 양주 작은 병을 딴다.

얼음 몇 조각을 넣고, 물을 절반가량 섞는다. 독한 것을 순하게 풀어 천천히 넘긴다. 서두르는 법이 없다. 어차피 함께 잔을 부딪칠 옛 친구들은 하나둘 먼저 세상을 떴다. 이제 이 한 잔은 그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조용한 의식 같은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풋볼 경기가 한창이다. 노인은 어느 팀이 이길지 혼자 점수를 맞혀 본다. 젊은 날의 그 승부욕이 여전히 눈빛에 살아 있다.

옆에는 오십 년을 함께 산 아내가 앉아 있다. 한의사다. 열세 살 아래인 아내가 그의 밥을 짓고, 그는 그런 아내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말수는 줄었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 함께 산 사람들만 아는 편안한 침묵이 흐른다.

이 그림만 보면 그저 평온한 노년이다.

그러나 이 평온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면, 함부로 다른 이의 삶에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열세 살에 피난길을 걸어 넘어온 소년이 있었다. 종로 바닥에서 주먹 깨나 쓰던 그 청년은 눈 쌓인 뉴욕 공항에 가방 하나 깔고 앉아, 이제 막 펼쳐질 낯선 땅을 막막하게 마주했다. 그런 그가 여기, 물 탄 술잔을 든 노인이 되어 앉아 있다.

송기룡. 애틀랜타 한인사의 산증인이다.

노름으로 몇십만 불을 날렸어도 끝내 누구에게도 빚 한 푼 남기지 않았고, 대통령이 될 사람들을 공항에서 픽업하고도 내미는 돈봉투는 창밖으로 던져 버린 사람. 이번 이너뷰는 그의 파란만장한 여든여덟 해를, 그의 목소리 그대로 따라간다.


개성에서 온 막내아들

기자: 어린 시절 얘기가 궁금해요.

송기룡: 내가 1938년 4월 7일에 경기도 개성에서 났어. 누이가 셋이고 나는 아들 하나, 막내였지. 위로 누님이 셋이나 되는 귀한 막내아들이니 좀 스포일이 됐어. 응석받이였던 거야.

아버님은 6·25 때 돌아가셨어. 그래서 아버님 얼굴은 거의 기억이 없어.

1·4 후퇴 때 외삼촌이 우리 집에 오셨어. 식구들 다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자고. 그때 내 나이 열세 살쯤 됐을 거야. 배도 타고 기차도 타고, 문산에서 내려서는 거기서부터 걸었어. 서울까지 걸어서 온 거지.

전쟁 통이라 학교도 한 1년은 못 다녔어. 서울에 와서 중학교에 가려니까 서류가 아무것도 없는 거야. 학교에서는 국민학교 졸업장부터 다시 따오라 하고. 나이는 이미 찼는데 억울해서 떼를 좀 썼지. 누이들이랑 매형들이 상의해서 우여곡절 끝에 겨우 나를 학교에 넣어 줬어.

그때 우리 같은 이북 사람한테는 ‘가호적’이라는 게, ‘피난민증’이라는 게 있었어. 그게 서울 사람이라는 일종의 시민증 노릇을 했지. 종이 한 장이 사람을 증명하던 시절이야.


종로 바닥 누비던 폭력배

기자: 청년 시절은 어떠셨어요?

송기룡: 대학 다닐 때 4·19가 터졌어. 반정부 데모도 참 많이 했지. 한때는 육군사관학교에도 들어갔었는데, 외출 나갔다가 사건에 휘말려서 금방 퇴교를 당했어.

그 뒤로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누이들, 매형들 찾아다니며 용돈이나 받아 쓰고 방황을 좀 했지.

내가 원래 운동신경이 좋았어. 고등학교 때 레슬링부도 하고, 싸움도 곧잘 했고. 그러다 보니 ‘대한실업’이라고, 유지광이 계열의 폭력 조직에 발을 들였어. 종로랑 명동 일대에서 패싸움하고 도망다니고 험하게 살았지.

내가 워낙 사고를 치고 다니니까, 둘째 매형이 나를 미국으로 보내기로 마음을 먹은 거야. 대령 출신에 힘이 좋은 양반이었어. 카투사 부회장도 하고 파워가 대단했지. 그 매형 아니었으면 나는 종로 바닥에서 어찌 됐을지 몰라.


눈 쌓인 뉴욕

기자: 미국 땅을 처음 밟던 날을 기억하세요.

송기룡: 1963년 12월인가. 눈이 엄청나게 쌓인 뉴욕 공항에 처음 내렸어. 춥기는 또 얼마나 춥던지.

나는 미국은 다 잘사는 나라인 줄 알았어. 그런데 공항 로비에서 거지가 동전을 달라고 구걸하는 걸 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어. 세상에, 미국에도 거지가 있구나.

픽업 올 사람을 8시간이나 기다렸어. 가방 하나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아서, 막막하게. 그 여덟 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해.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뉴욕에서 넉 달쯤 겨울을 났어. 그러고는 캘리포니아에 친구가 있다길래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탔지. 보름 가까이 버스만 타고 대륙을 횡단했어. 그렇게 캘리포니아에서 여섯 달을 지냈지.

그때는 관광비자로 들어왔던 터라 신분 문제를 풀어야 했어. 학교 등록을 해야 했거든. 그래서 1965년쯤 시카고로 옮겨서 학생 비자를 받고 본격적으로 정착했지.

60년대엔 미국에 들어오는 세관이 뉴욕에 하나뿐이었어. 어디를 가든 일단 뉴욕을 거쳐야만 했던 시절이었어.


시카고, 날것 그대로

기자: 시카고에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송기룡: 학교 다니던 1966년쯤에 한국 간호사 30명 정도가 시카고로 처음 들어왔어. 그때는 한국 여자가 귀하던 시절이야. 간호사들이 있는 국립병원 기숙사에 가서 한국 이름만 보고 무작정 벨을 눌렀지. 사람을 그렇게 찾았어.

지금처럼 다방이 있나. 데이트를 하려면 아이스크림 집에 갔어. 25센트짜리 하나만 시켜도 입이 얼 정도로 큼지막하게 주던 시절이야. 일요일에 쉬는 날이면 차 몰고 나가서 데이트도 하고.

그런데 간호사들이 3년 근무를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 깊은 연애까지는 잘 안 됐지.

69년도부터는 ‘임페리얼 이스트만’이라는 회사에 다녔어. 거기서 총알도 만들고 밸브도 깎고, 군수용품 만드는 일을 71년까지 했지.

그때 내가 혈기가 넘쳤어. 직장 다니면서도 경마니 포커니 술이니 하며 험하게 놀았는데 한 번은 싸움이 크게 나서 한 한인 언론사 신문에 내 이름이 실린다는 거야. 그래서 신문사에 있는 사람을 찾아갔어. “내 이름 한 자라도 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공갈을 좀 쳤지. 사고 치면 신문사까지 쫓아가서 불질러 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그땐 참 철이 없었어.

지금 집사람이랑 연애하던 중엔 술집에서 외상값 문제로 시비가 붙었어. 매니저가 여자친구 옆에서 망신을 주길래 화를 못 참고 부엌으로 끌고 들어가서 한바탕 패줬지. 덩치 좋고 기도를 보던 사람인데 내가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들었으니, 시카고 한인 사회에 소문이 쫙 퍼졌어.

그 시절엔 미국까지 와서도 경기고니 용산고니 하면서 고등학교끼리 패싸움을 참 많이 했어. 술 한 잔 들어가면 “너 어디 나왔냐”고 묻다가 싸움이 나곤 했지. 심지어 술 마시러 비행기 타고 LA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어. 지금 생각하면 다 젊음의 객기였지.


신원조회와 비싼 연애

기자: 사모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송기룡: 지금 집사람은 원래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간호사였어. 친구가 주소를 하나 주면서 편지나 한 번 써 보라고 해서 시작된 인연이야.

편지를 열 달 넘게 주고받았어.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전화를 하는데, 그때 독일이랑 통화 한 번 하려면 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어. 시카고 중앙우체국에서 뉴욕 거치고 독일 거쳐서 병원까지 연결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지.

그렇게 어렵게 통화하다 보니 전화비만 3,800불이 나왔어. 그때 3,800불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야. 우리 연애가 그렇게 비쌌어.

내가 서른네 살인데 아직 총각이라고 하니까, 집사람이 의심스러웠나 봐. 공사관을 통해서 내 뒷조사까지 했다더라고. 그때는 영사관이 아니라 공사관이던 시절이야. 내가 친하게 지내던 박 공사가 “누가 신원조회를 해 왔다”고 알려줘서, 집사람이 나를 조사한 걸 알았지.

집사람은 그때 스물한 살, 나는 서른네 살. 열세 살 차이야. 결국 내 프로필을 다 확인한 뒤에야 1972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바로 살림을 차렸어.

그렇게 시카고에서 가정을 꾸리다가, 75년에 애틀랜타로 내려온 거야.

Photo: 연애 시절 아내와 주고받은 엽서. Courtesy of 송기룡.

생선 비린내로 시작한 살림

기자: 애틀랜타에서의 첫 사업이 생선 가게였다지요.

송기룡: 조카가 플로리다로 유학을 와서 거길 가 보려다가, 시카고 친구들의 권유로 애틀랜타에 자리를 잡았어. 처음엔 혼자 내려와서 자리 좀 보고 나중에 식구들을 데려왔지.

미드타운에 조그만 가게를 얻어서 생선 장사를 시작했어. 2,500스퀘어피트쯤 되는 규모였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장사가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몰랐어. 그냥 일단 부딪쳐 본 거지.

친구들이 참 의리가 좋았어. 시카고에서 같이 지내던 이해근이라고 한국에서 아이스하키를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버님이 한국수산협회 회장이셨어. 그래서 그 친구가 생선 장사를 권했지. 고기 하는 놈은 고기를 밀어주고, 생선 하는 놈은 생선을 밀어주고, 과일 하는 놈은 과일을 밀어주면서 나를 도왔어. 물론 가게 뒤에서 맨날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회 떠 먹느라 장사는 뒷전일 때도 많았지.

Photo: 등산, 골프, 여행 등을 즐겼던 젊은 시절. Courtesy of 송기룡.

타코맥 창업주와 코카콜라 손자

기자: 특별한 인연을 많이 맺으셨습니다. 미국 사람들과도요.

송기룡: 장사 장비 구하러 중고품 상점에 갔다가 루이 챔버스를 만났어. ‘타코맥(Taco Mac)’ 파운더야. 버펄로에서 치킨윙 장사를 하다가 세금 문제로 가게를 접고 애틀랜타로 내려온 친구였어.

나랑 금방 친구가 됐지. 내가 만든 불고기를 먹어 보더니, 맛있다며 식당을 해 보라는 거야. 나중에 내가 식당 차릴 때 그 친구가 수만 불을 선뜻 내주면서 그랬어. “돈 벌어서 나중에 갚으라.” 그 친구는 나중에 타코맥으로 크게 성공해서 대기업이 됐지.

내 식당 건물주는 또 누구였느냐. 코카콜라 창업주의 손자, 밥 그리피스였어. 공군 대령 출신인데 나를 참 좋아했어. 그 쇼핑센터 전체가 다 그 사람 거였고. 조지아 땅은 자기 땅 아니면 안 밟고 다닌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였어.

식당 제대로 차려 보려는데 돈이 없어서 걱정하니까, 그 양반이 그랬어. “걱정 말고 준비해라.” 사인도 해 주고 4, 5만 불을 선뜻 내주더라고. 덕분에 방이 5개나 있는 번듯한 식당을 시작했지.

미국이라는 데가 그래. 사람만 진국이면, 국적이 뭐가 중요한가. 나를 도운 사람 중에는 미국 사람이 참 많았어.

Photo: 송기룡·송옥자 부부 인터뷰 기사 스크랩. Courtesy of 송기룡.

미러 오브 코리아

기자: 그 식당이 바로 한국관이지요?

송기룡: 식당 이름을 뭘로 지을까 고민하는데, 어떤 미국 여자가 ‘미러 오브 코리아(Mirror of Korea)’가 어떻겠냐는 거야. 한국을 비추는 거울. 다들 박수를 쳤지. 한국말로는 ‘한국관’이라 불렀어.

Photo: 세월이 흐른 뒤에도 페이스북에는 미러 오브 코리아를 기억하는 수많은 지역 주민들의 추억 어린 댓글이 이어졌다. Screenshot by Eunice Lee.

시카고에서 목수까지 데려다가 안에 물레방아도 만들고, 금붕어 다니는 아쿠아리움도 해 놓고, 공을 아주 많이 들였어. 방 다섯 개는 정말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어.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부터 함석헌 옹까지,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양반들은 애틀랜타 오면 다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갔어.

애틀랜타 공항 전광판에도 우리 식당 사진이 딱 붙어 있었어. 그때는 애틀랜타에 한식당이 우리 하나뿐이었으니까.

오픈하던 날, 새벽에 루이 챔버스가 전화를 했어. “온 집안 식구 다 끌고 와서 준비해라.” 난리를 치더라고. 알고 보니 ‘애틀랜타 저널(AJC)’이라는 큰 신문에 우리 식당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난 거야. 기자가 언제 와서 먹었는지, 사진까지 찍어서 빈대떡이 어떻고, 맛이 어떻고 아주 자세히 써 놨어.

그 기사 보고 아침부터 손님이 구름처럼 밀려드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그때부터 돈을 참 많이 벌었어.

우리가 1972년에 시카고에서 혼인신고는 했지만, 먹고사느라 정식 결혼식은 못 올리고 살았어. 그러다 1983년에야 애틀랜타 우리 식당에서 식을 올렸지. 그때 우리 두 아들이 벌써 열 살, 아홉 살이라, 애들이 결혼식 때 옆에 서 있었어. 한국에서 누님이 오셔서 “아직도 결혼식을 안 하면 어쩌냐” 야단을 치시는 바람에 서둘렀지. 전통 혼례로 치렀는데, 그게 또 애틀랜타 저널에 크게 보도됐어.

Photo: AJC에 실린 송기룡·송옥자 부부의 전통 혼례 사진과 기사. Courtesy of 송기룡.

송기룡 회장이 운영했던 ‘한국관’은 애틀랜타의 최장수 한국식당으로, 2006년 8월 그의 은퇴와 한인타운의 지형 변화 등이 맞물리며 폐업했다. 미드타운의 1047 폰세 데 리온 길 선상에 위치했던 식당은 사실상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어 의미가 깊다.


다운타운에서 불태운 소련 국기

기자: 식당 하시면서 반정부 운동에 앞장서셨다고요.

송기룡: 나는 젊어서부터 애국심 하나는 끝내줬어. 불을 보면 못 참고 뛰어드는 성미라.

1983년, 소련놈들이 우리 KAL기를 격추해 버렸어.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그대로 죽었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 그래서 애틀랜타 다운타운 파이브 포인트(Five Points)에 나가서 소련 국기를 불태웠어.

조지아텍 학생회에 연락하고, 에모리 총학생회장한테도 다 말해 놨는데, 막상 나가 보니 학생들은 아무도 안 나오더라고. 그래도 어디선가 한국 사람이 열 명쯤 꾸역꾸역 모여서 같이 소련기를 태웠지.

Photo: 1983년 애틀랜타 다운타운 파이브 포인트에서 소련 국기를 불태우는 장면이 보도됐다. Courtesy of 송기룡.

거슬러 올라가면 1973년, 김대중 씨가 미국에 망명 왔을 때야. 시카고에서 친구 하나가 찾아와 조직을 만들자고 해서, ‘평화통일 촉진 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시카고 지부를 맡았어.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납치당했을 때는 시카고 다운타운에 수백 명이 모여 독재 타도를 외치며 데모를 했고. 나도 연사로 나가서 연설까지 했지.

그런데 그때 여행사 하던 친구 사무실에서 우리 데모하는 걸 다 촬영하고, 영사관에서도 사진을 찍어 갔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다 보고가 돼서, 내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더라고.

5.18 광주 민주화 사태 때는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어. 국민학교 다니던 큰아들 놈을 데리고 다운타운 영사관 앞으로 갔지. 아들 앞뒤로 ‘전두환 흡혈귀 몰아내자’라고 쓴 판때기를 걸어주고, 나도 피켓을 들었어. 아들은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거야. 그렇게라도 울분을 토해내야만 했어.

데모 주동했다고 찍히는 바람에, 한국에 들어가면 맞아 죽는다는 소리까지 들었어. 여행사 하던 친구가 그랬어. “송 형, 나는 형님 비행기표 못 끊어줘. 한국 들어가면 형님 죽어.” 집사람이 애들 데리고 한국 나갈 때도 공항에서부터 안기부 놈들이 따라다녔다더라고. 캐나다를 통해 나한테 이북 잡지 같은 게 오기도 했는데, 나는 오해받기 싫어서 그걸 다 모아 공사관에 갖다주며 결백을 증명했지.

그렇게 고국 땅을 못 밟고 살다가, 정권이 다 바뀌고 나서야 30여 년 만에 겨우 한국에 다시 가 봤어. 참 서글프고도 긴 세월이었지.

Photo: 김대중 전 대통령이 송기룡 씨 부부에게 보낸 친필. 1984년 12월 날짜와 서명이 남아 있다. Courtesy of 송기룡.

사라진 박사 가운

기자: 김대중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으시다고요.

송기룡: 칠십년대 어느 해, 김대중 씨가 에모리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어.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지.

한국 돌아가는 길에 공항 세관에서 중앙정보부 놈들이 그 박사 가운이랑 상장을 싹 다 빼앗아 버린 거야. 사모님이 나한테 전화해서 울먹이시더라고. “송 동지, 이게 다 없어졌어.”

그래서 내가 다시 에모리 대학 비서한테 연락해서 사이즈 알려주고 가운을 새로 만들었어. 내가 직접 한국에 들고 가고 싶었지만, 그때 분위기론 맞아 죽을 것 같아서 못 갔지. 에모리 총장 비서 편에 몰래 들여보냈어.

김대중 대통령 막내아들 홍걸이가 에모리대 다닐 때는 내가 참 고생을 많이 했어. 사모님이 나만 믿는다고 눈물로 부탁하시니까 지극정성으로 돌봤지. 한 번은 홍걸이가 학교도 안 나오고 열흘 넘게 행방불명이 됐어. 에모리 총장 비서가 우리 집에 찾아와 난리가 났지. 결국 버지니아 산속 친구 집에 있는 걸 내가 찾아내서 데려왔어.

애가 아버지 매 맞고 고초 겪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사람을 잘 안 믿었어. 그럴 만도 하지. 그 집안 사정을 알면 누가 그 애를 탓하겠어. 학교도 안 가고 속을 썩일 때마다 내가 일일이 체크하고 찾아다니느라 밤잠을 설친 적도 많아. 그때는 테러 위협까지 있어서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그 집안과 에모리 대학의 깊은 인연 때문에 내 할 도리를 다 하려 노력했지.

Photo: 워싱턴 D.C.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의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초청장. Courtesy of 송기룡.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김홍일·김홍업·김홍걸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위의 두 아들은 안기부에 찍혀 미국 땅을 밟지 못했고, 막내 홍걸만이 유학길에 올랐다. 훗날 차남 홍업 씨는 아들 종대를 에모리대로 보냈다. 홍걸이 공부했던 곳이자 송기룡 회장과 레이니 전 대사 같은 지인들이 있는 애틀랜타를 택한 것이다. 애틀랜타의 한 언론사 사장에 따르면, DJ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한국을 찾아 인터뷰를 했는데, ‘송기룡 회장 소개로 왔다’고 하자 대접이 갑자기 융숭해졌고, DJ가 직접 안부를 전해 달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에모리와의 인연으로, 손자 김종대는 에모리대를 졸업한 뒤 클락스빌에서 난민 청소년을 돕는 일을 했다.


잘 가시게, 레이니

기자: 얼마 전 별세하신 에모리대 제임스 레이니 전 총장과는 각별하셨다고요.

송기룡: 레이니 총장하고는 정말 잠만 같이 안 잤다 뿐이지, 친형제처럼 지냈어. 이 양반이 원래 한국에 선교사로 몇 년 가 있었거든. 한국 사정을 아주 잘 알았어.

솔직히 말하면, 그 시절 선교사로 나간 양반들이 다 정보 수집하는 역할도 좀 했어. 레이니 총장도 박정희 대통령한테 추방당했던 오글 박사하고 다 연결이 돼 있었지. 나랑 레이니 총장, 오글 박사 이렇게 셋이서 저녁도 자주 먹으러 다녔어. 그런 인연 덕에 김대중 대통령이 에모리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거야.

레이니 총장은 나중에 주한 미국 대사까지 됐어. 선교사로 갔던 청년이 그 나라 대사로 돌아간 거지.

그 양반이 얼마 전에 갔어. 장례식도 다녀왔지. 사람이 오래 살면 이렇게 하나둘 먼저 보내는 게 일이야. 밥 그리피스는 2003년에 췌장암으로 갔고, 이제 레이니 총장까지 갔으니. 내 젊은 날을 아는 사람들이 자꾸 줄어.

Photo: 레이니 전 에모리대 총장이 보낸 감사 편지. Courtesy of 송기룡.

제임스 T. 레이니(James T. Laney) 전 에모리대 총장은 2026년 8월 29일,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젊은 미군 병사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그는 1950~60년대 한국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했고,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에모리대 총장을,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시기에 한국인들 곁을 지킨 목회자이자 교육자였으며, 자신의 영향력을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쓴 사람으로 기억된다.


돈봉투는 창밖으로

기자: 정치인들 뒷바라지를 많이 하셨어요.

송기룡: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애틀랜타에 오면, 내가 공항에 나가서 직접 픽업했어. 그때는 테러 위협이 있어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때야. 내가 모텔도 잡아 주고 수발을 다 들었지. 이희호 여사가 나중에 고맙다고 금수저며 시계며 자필로 쓴 것들을 보내주셨는데, 그게 아직도 우리 집에 유물처럼 남아 있어.

김영삼 씨가 당수 시절에 왔을 때는 라디오 인터뷰도 시켜 주고 신경을 많이 써 줬어. 그런데 갈 때 고맙다면서 돈 봉투를 쓱 내미는 거야. 내가 누군데 그런 돈을 받겠어. 절대 안 받는다고 창문 너머로 도로 던져 버렸지. 난 정치인들하고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해서 사진 한 장 없어.

친구들은 나를 바보 취급했지. “야, 이 병신아, 남들은 다 돈 받고 하는데 너는 왜 주는 돈도 안 받냐?” 그래도 나는 생각이 달랐어. 그 사람들 대통령 되고 나면 그걸로 끝이라고. 사람이 잘 되면 변하는 법인데, 내가 뭐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니까. “잘됐으면 됐다” 하고 말았지. 대통령이 된 다음부터는 일절 연락하지 않았어. 선거 성금이나 좀 보내고, 내 할 도리 다 했으면 됐지.

Photo: 인권봉사상 표창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전달한 손목시계. Courtesy of 송기룡.

노름, 그리고 빚

기자: 스스로 노름꾼이었다고 하셨어요.

송기룡: 그래. 돈을 많이 벌면 뭐 해. 그놈의 노름 때문에 다 날렸지.

디캡카운티 비행장 가서 3,000불씩 주고 경비행기 빌려 타고, 뉴저지 애틀랜틱 시티까지 가서 블랙잭을 했어. 술값하고 노름으로 날린 돈만 몇십만 불은 족히 될 거야.

노름빚이라는 게 참 무서워. 만 불을 꾸면 갚을 때는 이만 불이 있어야 해결이 돼. 빚이 빚을 낳고 늘어나기만 하는 거야. 경마장 갔다가 돈 다 잃고는 혼자 차 안에서 운 적도 많아. “내가 왜 이걸 못 끊나.” 자책도 많이 했고.

내 인생에서 제일 괴로웠던 게 그 빚 갚는 일이었어. 도라빌에 빌딩 짓는다고 첫 삽 뜨고 다 해서 사업 벌여 놨다가 결국 노름 때문에 다 엎어지고, 돈도 다 날리고.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 창피해 죽겠더라고.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

Photo: 도라빌에 2층 규모의 코리아타운 플라자 건설을 시작했지만, 완공을 앞두고 결국 포기해야 했다. 송 씨는 이때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속상했던 시기로 회고한다. Courtesy of 송기룡.

그런데 말이야. 나는 노름은 했어도, 빚은 지고 못 살아.

다행히 옛날에 사둔 땅이 나를 살렸어. I-20 근처에 33에이커쯤 되는 땅을 사 둔 게 있었는데, 2000년도쯤에 그걸 팔아서 노름 빚을 싹 다 청산했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갚았어.

돈을 그렇게 날렸어도, 나는 남의 돈 떼먹은 적이 없어. 빌린 건 다 갚았고, 받을 거 있어도 모질게 받아낸 적 없어. 남한테 신세 지고 사는 게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게 개성 사람 기질인지, 우암 송시열 선생 자손이라는 자존심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내가 한창 밖으로 돌 때, 집사람이 견디다 못해 애들 데리고 한국으로 도망을 간 적이 있어. 그런데 우리 장모님이 집사람 얘기를 듣지도 않고 “집에 들어올 생각 말라”며 일주일 만에 도로 미국으로 돌려보내셨지. 내가 우암 송시열 선생 자손이라 뼈대 있는 집안이니, 그 피는 어디 안 간다고 믿으셨던 거야. 장모님 돌아가실 때 가보지도 못했어. 노름으로 돈 잃고 비행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형편없는 나를 믿어 주신 장모님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Photo: 젊은 시절 부부의 모습. Courtesy of 송기룡.

재산 날린 사람이 뭔 자선

기자: 노름 빚 갚느라 그 고생을 하셨는데, 남한테는 또 그렇게 퍼주셨다고요.

송기룡: 나는 예전부터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어. 한국에서 버스를 타든 전철을 타든,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주고 정작 나는 집까지 걸어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야.

미국에 와서도 차 안에 늘 1불짜리를 뭉치로 갖고 다녀. 홈리스 보면 나눠 주고. 사람들이 마약 하니까 주지 말라고 말려도, 내 마음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80년대에 한국에 수재가 났을 때도 영사관 통해 성금 보내고 고아들도 도왔어.

노름으로 재산을 날린 사람이 무슨 자선이냐고 하겠지만, 나한테는 그게 앞뒤가 안 맞는 일이 아니야. 노름은 나 좋자고 한 짓이고, 저건 사람이 사람한테 하는 도리야. 그건 별개지.

재물이라는 게 참 묘해. 내 손을 떠나다가도, 들어올 때는 또 무섭게 들어와. 후배 하나가 카터스빌 쪽에 배터리 공장이랑 태양광 시설 들어온다고 같이 가 보자길래, 거기 30만 불짜리 새집 두 채를 샀는데 그게 무진장 올랐어. 집사람이 큰 집 팔아서 집 사고, 그걸 또 굴리면서 재산이 불었지. 지금은 집이 다섯 채야. 빚도 다 갚고, 한의원 건물도 현찰로 샀고.

노름 빚에 쫓기던 시절 생각하면,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보통 내공이 아니야

기자: 사모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어요.

송기룡: 우리 집사람이 참 대단한 여자야. 경상도 여자라 마음가짐이 아주 강단이 있어.

간호사 하다가 나 만나서 식당 일하고 애들 돌보면서도 무려 11년을 공부해서 한의사가 됐어. 집사람이 공부할 때는 나도 집에서 빨래하고 밥해 놓고 가사를 다 도왔지. 늙어서 손 떨면 침 어떻게 놓느냐고 내가 말리기도 했는데, 결국 해냈어. 지금은 예약 손님만 받으며 정성껏 진료를 해. 집사람 덕분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많아.

8년 전엔 한의원 할 건물을 딱 보더니 마음에 든다고, 깎지도 않고 바로 샀어. 지금은 우리 두 늙은이가 아주 재미있게 운영하고 있지.

내가 영창을 안방처럼 들락날락했어. 술 마시고 불법 노름을 하다가 걸려서 감옥에서 한 석 달 동안 살다 나온 적도 있고, 보통은 한 이 주나 한 달씩 수시로 들어갔다 나왔지.

특히 술 때문에 걸린 DUI만 무려 열 번이었으니, 면허도 빼앗기고 그거 어떻게든 다시 살려 보겠다고 변호사한테 돈을 무진장 썼어. 임시 면허라도 받아보려고 온갖 애를 썼는데, 그 시절 추운 겨울날 면허 문제 때문에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히지.

내가 밖으로 돌다가 집에 안 들어오거나 연락이 뚝 끊기면, 우리 집사람은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따로 물어보지도 않고 ‘아, 이 양반이 또 제일(Jail)에 들어가 있구나’ 하고 단박에 알아챘어. 나 때문에 그 속이 아주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텐데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으니, 가만 보면 우리 집사람이 정말 보통 내공이 아니야.

집사람이 여행을 좋아해. 그래서 틈날 때마다 세계 여행을 참 많이 다녔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애들은 내가 아주 무섭게 가르쳤어. 한 번은 총이랑 칼을 갖다 놓고 그랬어. “아버지 말 안 들으려면 이걸로 나를 쏴 죽이든지 찔러라. 그럴 거 아니면 아버지 말 들어라.” 내가 밖으로 돌고 노름하느라 속은 썩였어도, 애들만큼은 그렇게 엄하게 키웠어. 그 덕인지 다들 제 몫 하며 잘 컸어.

Photo: 가족 사진. Courtesy of 송기룡.

매일 저녁, 물 탄 양주 한 잔

기자: 요즘 하루는 어떻게 보내세요.

송기룡: 나는 지금도 매일 술을 마셔. 양주 작은 병 하나를 물이랑 얼음에 타서 천천히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이야.

내 또래들은 아파서 술도 못 마신다는데, 나는 매일 아침 걷기 운동도 하고 아주 건강해. 술 한 잔 하면서 텔레비전으로 풋볼 보는 걸 참 좋아하지. 그 승부욕은 아직도 여전해. 시즌 티켓 끊어서 경기장 다니는 한국 사람은 우리 부부밖에 없었을 거야. 지금도 누가 이기나, 점수가 몇 점이나, 그거 맞히는 재미로 살아.

나이가 아흔을 바라보고 80평생을 타향에서 살다 보니, 조국이 점점 더 그리워지고 애국심이 강해져. 예전에 한국 나갔을 때 호텔 앞에 외제 차가 즐비한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제는 한국이 잘사는 게 사치가 아니라 그만큼 발전한 거구나 싶어.

이제 나는 어느 정당이 좋고 나쁘고를 안 가려. 그저 도둑질 안 하고, 국민 잘 살게 해주는 리더 하나면 족해. 우리 후손들이 조국을 잊지 않고, 좋은 리더 밑에서 평안히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됐어.

그는 살아온 인생 속 사건들과 사진들을 모아 손수 스크랩북을 만들어 두었다. 매일 들여다보며 다시 정리하는 게 취미다. 이번 이너뷰에 소개된 스토리는 그의 인생의 아주 단편적인 예고편 같은 것일 뿐, 나중에 진짜 책 한 권을 내는 것이 그의 꿈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한의원 건물을 나서니, 검은색 스웨터를 입은 사모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송 회장은 아내의 스웨터를 가리켰다. “우리 집사람 속이 아마 이렇게 됐을 거야. 이렇게, 까맣게.”

영문을 모르는 사모님은 그저 잔잔히 웃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여전히 저녁마다 술잔을 든다.

조국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에 한 잔,

객기 어린 청춘과 그 시절 함께 지나온 인연들에 한 잔,

노름이든 은혜이든, 빚지고는 못 사는 그 마이웨이에 한 잔.

글. 이승은 (Eunice Lee) / InnerView. No.27 2026년 9월 9일

송기룡·송옥자 부부. Photo by Eunice Lee.

송기룡 약력

이민·정착 · 1938년 개성 출생 / 1·4후퇴 당시 열세 살에 월남 / 1963년 미국 이민 / 뉴욕·캘리포니아·시카고를 거쳐 1975년 애틀랜타 정착

비즈니스 · 애틀랜타 초기 한식당 ‘한국관(Mirror of Korea)’을 30여 년간 운영하며 한식과 한국 문화를 주류사회에 알림 / 현재 부인 송옥자 한의사와 ‘아주 송 한의원’ 운영

한인사회 · 전 애틀랜타 한인상가번영회 회장 /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지도자 시절 애틀랜타 방문 지원 / 민주화운동과 한인사회 주요 현장에 앞장선 애틀랜타 이민사의 산증인

철학 · “노름은 했어도 빚지고는 못 산다”는 원칙으로 모든 빚을 끝까지 갚은 개성상인 기질 / 받은 은혜와 사람의 도리를 중시하며 조국에 대한 사랑과 한국인의 뿌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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