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다른 기억
2006년 봄날 오후, 조지아 북부의 한 축구장. 경기 전 몸을 풀던 소년들 위로 하늘이 흔들렸다. 애틀랜타 상공의 에어쇼에서 날아온 전투기 편대였다. 공이 발등을 때리는 소리, 골망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뿐이던 잔디밭 위로 굉음이 밀려들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신기한 듯 고개를 젖혔다. 반면 몇몇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들에게 전투기는 구경거리가 아니라, 폭탄이 떨어지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자 워런 세인트 존은 이 장면을 자기 책¹의 첫 페이지로 골랐다. 단 몇 초의 정지 화면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축구장이 있던 도시의 이름은 클락스톤. 애틀랜타에서 차로 이십 분 남짓 거리, 디캡 카운티의 작은 도시다.
¹ 『아웃캐스츠 유나이티드(Outcasts United)』. ‘쫓겨난 자들이 하나가 되다’라는 뜻으로, 2009년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른 논픽션이다.
가장 다양한 1제곱마일
클락스톤은 원래 조용한 남부의 백인 마을이었다. 1980년만 해도 인구의 90퍼센트가 그랬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이곳을 난민 정착지로 지정하면서 모든 것이 뒤집혔다. 애틀랜타와 가깝고, 대중교통이 닿고, 집세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수단, 라이베리아, 소말리아, 보스니아, 코소보, 콩고,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수십 개 나라의 사람들이 이 도시로 흘러들었다. 40년 사이 6만 명이 넘는 난민이 거쳐 갔고, 오늘날 주민의 절반가량이 외국 태생이다. 지역 초등학교 홈페이지는 1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된다. “미국에서 가장 다양한 1제곱마일”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인구는 달라졌지만 도시의 학교와 경찰과 행정, 오래 살아온 주민들의 인식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세인트 존은 이를 “함께 살아가는 법에 관한 거칠고 팽팽한 실험”이라 적었다.

핸들을 잘못 꺾은 날
2004년의 어느 날, 한 여자가 클락스톤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차를 돌리려 핸들을 꺾다가, 공터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았다. 바람 빠진 공이었고, 골대 대신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마 무플레. 요르단 출신으로 암만의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미국 유학 뒤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자 가족에게 절연당했다. 무슬림이었고, 시리아계였고, 동성애자였다. 한동안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버텼다. 그런 그녀가 돌멩이 골대 앞에서 문득 깨달았다.
“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이 아니라 어른이다.”
그해 여름, 그녀는 전단을 붙였다. 난민 축구팀 선수를 모집한다고. 팀 이름은 퓨지스(Fugees). ‘refugee(난민)’를 줄인 슬랭이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코치 루마”라고 불렀다.
“여자가 무슨 축구를 알아?”
첫 공개 선발에는 스물세 명의 소년이 모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처음부터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지역 교회 가운데는 무료 농구교실을 열어 놓고 사실상 선교 활동을 했던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아이들은 아예 믿지 않았다. 여자가 축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리 없다고.
어느 날 훈련 중,수단 출신 한 소년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루마가 들었다.
“여자잖아. 축구를 뭘 안다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를 골문 앞으로 불렀다.
“골키퍼 해.”
소년이 골문에 서자 루마는 전력을 다해 슛을 날렸다. 공은 총알처럼 날아갔고, 소년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공은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또 누구?”
그 이후, 그 문제를 꺼내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에이스도 예외는 없었다
코치 루마는 흔히 상상하는 따뜻한 자원봉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엄격했다. 어린 선수들은 숙제를 안 하면 경기에 못 나갔다. 지각하면 훈련에서 빠져야 했고, 거짓말을 하면 팀에서 쫓겨났다. 실제로 팀의 에이스였던 한 소년도 그 원칙 앞에서 짐을 쌌다.
그녀는 훈련 때마다 아이들을 일부러 뒤섞었다. 콩고 아이와 수단 아이, 무슬림과 기독교인, 발칸 출신과 아프리카 출신을 한 조에 묶었다. 전쟁은 이 아이들에게 “너는 우리 편, 너는 저쪽”을 가르쳤고, 그 편 가르기가 부모와 집과 나라를 앗아갔다. 축구만은 반대를 가르쳐야 했다. 우리는 한 팀이라고.
루마가 끝까지 지킨 원칙은 하나였다. 축구가 아니라 인생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축구공 하나만 바라본 이름들
루마는 곧 깨달았다. 국적도, 언어도, 종교도 모두 달랐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가 상실을 경험했다는 것. 누군가는 아버지를 잃었고, 누군가는 고향을 잃었으며, 누군가는 어린 시절 자체를 잃었다. 그 공통의 상처가 이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주고 있었다.
돼지고기를 끊은 제레마이아
퓨지스에 가장 먼저 들어온 막내는 라이베리아에서 온 제레마이아였다. 코치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자기도 돼지고기를 끊었다. 그 애가 루마를 그토록 따른 데는 사연이 있었다. 어느 밤 무장한 남자들이 집에 들이닥쳐 아버지에게 돈을 내놓으라 했고, 없다고 하자 그를 때려 죽였다.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세 아들을 끌어안고 뛰쳐나왔다. 넷째 아들은 그 아수라장에서 잃어버렸다. 열흘을 걸어 국경을 넘고, 진흙 오두막에서 5년을 견딘 끝에 닿은 곳이 클락스톤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도 평화는 없었다. 어머니는 애틀랜타 벅헤드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구했지만, 첫 출근 날 밤 버스에서 내리다가 가진 것을 통째로 빼앗겼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어린 제레마이아에게 말했다.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마.”
낡은 규칙서를 든 첸드림
작고 날랜 미드필더는 알록달록한 반다나를 두르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코소보에서 온 첸드림이었다. 아이의 손에는 낡은 축구 규칙서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이름난 골키퍼이자 심판이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물려준 책이다. 첸드림의 가족은 원래 남부 카차니크에서 식료품점 두 곳을 꾸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첸드림이 5살이던 1999년, 전쟁이 마을 큰길까지 번졌다. 어떤 이웃은 걸어서 달아났고, 어떤 이웃은 훗날 집단 매장지에서 발견됐다. 가족은 집도, 두 개의 가게도 두고 떠나야 했다. 그가 챙긴 건 그 규칙서뿐이었다. 잃어버린 유년이 조지아의 햇빛 아래 공 하나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저녁을 짓는 형, 이드와르
훈련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는 아이가 있었다. 수단에서 온 이드와르였다. 동생들의 저녁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피해 대륙을 건너 미국 땅을 밟은 직후, 교통사고로 어머니와 누이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새 삶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 문턱에서였다. 남겨진 건 어린 형제뿐이었다. 밥을 안치고, 상을 차리고, 아침이면 학교로, 오후면 경기장으로. 그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이드와르 형제의 발끝에는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코치 루마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봤고, 퓨지스는 이 형제를 중심으로 단단해졌다. 슬픔을 풀어낼 말이 아직 없던 아이들에게, 축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였다.
콩고, 부룬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명단은 더 길었다. 이 아이들에게 잔디밭은 유일하게 허락된 바깥이었다. 바로 그 잔디밭을 두고, 도시는 이제 막 또 다른 전쟁을 치르려던 참이었다.
기자가 본 9-2
워런 세인트 존이 퓨지스를 처음 본 날, 그들은 9-2로 이겼다. 뉴욕 타임스 기자였던 그의 눈을 붙든 건 그 스코어가 아니었다. 라이베리아 소년의 패스가 코소보 소년에게, 다시 콩고 소년의 발끝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갈라놓은 아이들이 한 팀으로 뛰고 있었다. 여느 유소년 팀에서는 본 적 없는 무언가가, 그 잔디밭에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그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좋은 이야깃거리가 여기 있다는 감이 왔다. 그러나 취재가 깊어질수록, 잔디밭 위의 화음과는 다른 소리가 도시 곳곳에서 들려왔다. 나이지리아 출신 상인은 검문 도중 경찰에게 맞았고, 한 수단 난민은 어른들의 축구 리그를 꾸리려다 경찰에 시달렸다. 아이들이 공을 차는 공원 바깥에서, 도시는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잔디는 죄가 없었다
그해 여름, 클락스톤 시장 리 스웨이니가 시립공원 아미스테드 필드에서 축구를 금지했다.
그가 지역 신문에 한 말은 이랬다.
“저 구장들은 축구용으로 만든 게 아니다. 내가 시장인 한, 저기서는 야구만 할 것이다.”
표면적 이유는 잔디 훼손과 야구 전용 시설이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일부 주민들에게 축구는 원치 않는 변화의 상징이었다. 마을에서 흔히 보이기 시작한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만큼이나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다.
‘우리 동네 운동장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스웨이니는 심지어 축구를 하는 난민들을 가리켜 “사커 피플(the soccer people)”이라고 불렀다.
숫자를 들여다보면 그림은 선명해진다. 스웨이니는 “옛 클락스톤”, 곧 난민이 오기 전의 도시를 대변한다는 기치로 당선된 사람이었다. 난민들은 대부분 시민권이 없어 투표할 수 없었고, 권력은 오래 살아온 주민들의 손에 남았다. 그에게 두 번째 임기를 안긴 2005년 시장 선거는 단 390표로 갈렸다. 스웨이니의 승리였다.
1면 톱기사
2007년 1월 21일, 세인트 존의 기사가 뉴욕 타임스 1면 톱으로 올랐다.² 그가 클락스톤 축구장에서 목격한 두 가지가 거기 나란히 담겼다.
적의, 그리고 희망.
희망은 잔디밭 위에 있었고, 적의는 잔디밭 밖에 있었다. 그는 이 기사를 ‘갈등 기사’로 쓰지 않았다. 난민들만의 이야기를 하지도, 기존 주민들을 악역으로만 그리지도 않았다. 한 도시가 급격한 인구 변화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 변화 속에서 축구가 어떻게 사회적 상징이 되었는지를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다양성이 얼마나 큰 긴장을 만드는가” 그것이 그의 시선이었다.

반향은 즉각적이었다. 전국에서 후원금이 들어왔고, 시 정부는 결국 막았던 경기장을 다시 열어야 했다.
2009년, 그는 취재를 넓혀 『아웃캐스츠 유나이티드』를 출간했다. 난민들의 고통을 깊이 보여주면서도, 기존 주민들의 불안 역시 외면하지 않았다. 그가 던진 진짜 질문은 축구가 아닌 ‘오늘의 미국이란 무엇인가’였다.
² 기사 제목은 “Refugees Find Hostility and Hope on Soccer Field(난민들, 축구장에서 적의와 희망을 만나다)”.
유리장 안의 모순
2016년 대선 다음 날 아침, 퓨지스 아카데미 아이들은 울면서 등교했다.
“왜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해요?”
이듬해, 트럼프 1기의 ‘여행 금지’가 발효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루마와 학생 아홉 명은 워싱턴 D.C.로 향했다. 스미소니언 포크라이프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것이다. 아이들은 수도 한복판에서 축구를 선보이고 둘러앉아 자신들이 겪은 전쟁과 피난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국립 미국사 박물관 ‘Many Voices, One Nation(여러 목소리, 하나의 국가)’ 전시장을 찾았다. 벽면 가득 “No Soccer Allowed(축구 금지)”라는 글씨가 내걸린 그 아래, 퓨지스의 초록색 유니폼과 낡은 축구화, 2009년 토네이도 챌린저컵 우승 트로피가 놓여 있었다. 난민이 막 문전박대 당하던 그 순간, 한때 ‘축구는 안 된다’던 그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미 미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고 있었다.

Now / What’s Next
2026년, 시계는 또다시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트럼프 2기 첫날, 난민 정착이 전면 중단됐다. 이른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은 난민의 의료·식비 지원을 걷어내기 시작했고, 조지아는 이민 단속 체포 건수에서 전국 4위에 올랐다. 2025년 한 해에만 8천여 명이 붙잡혔다.
소말리아, 수단, 남수단, 콩고. 여행 금지 대상에 오른 나라들은 하필 클락스톤 가족들이 떠나온 곳이었다. 한때 “가장 다양한 1제곱마일”이라 불리던 거리에 이번엔 ICE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불법 이민 문제가 민감한 지역인 만큼, 많은 사람들은 이 아이들이 불법 체류자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난민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다.
루마는 말한다.
“퓨지스는 사람들의 본심을 드러나게 했죠. 계층에 대한 생각, 인종에 대한 편견…. 아이들은 억양이 다르고 미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사실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클락스톤은 여전히 ‘남부의 엘리스 아일랜드’로 불린다. 코치 루마의 팀은 방과 후 교실과 여름 캠프를 거쳐 정식 학교로 성장했다. 디캡 카운티 난민 학생의 고교 졸업률이 20퍼센트에 그칠 때, 그녀가 세운 퓨지스 아카데미의 졸업률은 90퍼센트였다. 많은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했고, 학교는 조지아를 넘어 오하이오와 켄터키로 뻗었다.
20년 전 전투기의 굉음에 몸을 움찔했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고, 상당수가 시민권을 얻어 투표소에 섰다. 한 나라가 낯선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 이승은 (Eunice Lee) / Frame. No.26 · 2026년 8월 5일

그 후, 루마 무플레
코치 루마는 여전히 퓨지스 패밀리의 창립자이자 CEO로 일하고 있다. 2004년 클락스톤에서 우연히 시작된 그녀의 축구팀은, 오늘날 조지아의 퓨지스 아카데미와 켄터키의 테랑가 아카데미를 비롯해 약 40개국 출신 아이들을 품는 전국 단위 교육 모델로 자랐다. 학비는 받지 않는다. 입학 조건은 단 하나, 집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난민·이민자 아이일 것.
2016년 CNN ‘올해의 영웅’ 톱10, 180만 회 이상 재생된 TED 강연, 두 권의 책 『Learning America』와 회고록 『From Here』. 그리고 2025년, 그녀는 모교 스미스 칼리지의 졸업식 연단에 섰다. 오프라 윈프리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올랐던 바로 그 자리였다.
2026년, 루마 무플레는 전미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 헌액됐다. 한때 조국에서 쫓겨나고 정착한 나라에서도 문전에서 밀려나던 사람이, 이제 국가가 이름을 새겨 기리는 사람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