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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방패

프롤로그 — 한 사람의 이야기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살리면, 그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러시아의 어느 교회. 19살 여자아이가 예배 중에 일어나 발광한다. 마약 금단현상이다. 장정 둘이 붙잡아도 안 되고, 만 명 앞에서 설교하던 목사의 기도도 듣지 않는다.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한 목사는 그 아이 옆에 14개월을 머문다. 이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폴 임. 그는 마약이 가장 쉽게 판치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손에 보이지 않는 방패 하나 쥐어 주는 일에 30년 가까이 매달려 왔다.

러시아에서 미국, 전 세계로 눈을 돌리는 그가 어떻게 만 명을 모으는 자리에서 한 명을 지키는 자리로 내려왔는지, 그 길고 따뜻한 여정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0번을 출격하고 살아남은 영웅

기자: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폴 임: 제가 54년도에 6·25 전쟁이 끝나자마자 태어났어요. 우리 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이셨죠. 한국 공군 조종사 1기생으로 공군 창설자나 마찬가지였어요. 전쟁 중에 200번 출격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딱 두 사람인데, 그중 한 명인 임종두 중령이었어요.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까지 훈장도 엄청 타셨고 지금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시지요.

출처:한국전 참전 공군 100회 출격 전우회/ 월간항공

저는 사천 비행장 관사에서 태어났어요. 이북에서 피난 온 어머니가 강릉 비행장에서 중위이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죠. 어머니가 저를 임신하고 열 달 동안 강릉, 수원, 오산, 사천 비행장마다 따라다니다가 사천에서 낳으신 거예요. 어머니는 시골 엄마같이 착하고 순한 여성이셨던 반면, 아버지는 늘 근엄하고 똑똑하시고 저를 야단치시던 무서운 분으로 기억해요.

아버지 친구분 말씀에 따르면 미군 부대에서 식량이나 초콜릿이 나오면 아버지가 관사 안을 돌며 미군 한국군 가리지 않고 다 내놓으라고 해서는 가방 두 개에 꽉 채워서 비행장 근처 가난한 사람들한테 전부 나눠 주셨대요. 또 부대 안에서 미군들하고 싸우면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킨 분은 우리 아버지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출처: 한국전 참전 공군 100회 출격 전우회 포스터 / 월간항공

전쟁의 하늘에서 200번을 살아 돌아온 아버지. 그 아버지의 ‘지키는 자존심’과 ‘나누는 손’은 이후 아들의 핏줄에 그대로 새겨진 듯하다.


김일성보다 우리 대통령 아버지

기자: 청년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폴 임: 저는 아버지 사랑을 많이 못 받아서인지 제 멋대로 군대에 갔어요. 근데 당시 계급장이 높은 분들의 자녀들은 히스토리가 남는지 논산 훈련소에서 키 크다고 뽑혀서 수도경비사령부로 가게 됐습니다. 거기서 훈련 실컷 받고 났더니 또 헌병으로 뽑혀서 총 들고 대통령을 지켰어요. 아버지 덕에 편한 곳에 간 게 아니라 완전 센 데에 간 겁니다. 신분이 확실하니 중요 임무에 배정된 거예요.

헌병 시절/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3년 동안 김일성보다 우리 대통령이 아버지라는 투철한 정신 교육을 받고 맨날 총 쏘고 태권도 했어요. 제가 또 부대에서 총을 1등으로 잘 쐈잖아요. 제대하는 날 소감 말하는 자리에서 정해진 답변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시간이 빨리 간 것 같아서 “3년 더 하라 그래도 하겠습니다” 했다가 “이 자식아 너 다시 들어가라”며 엄청 혼이 났더랬습니다.

제대하고 나서 중대장님이 제가 원리 원칙대로 검문 잘하고 군인정신이 투철하다며 중앙정보부 자리를 소개해 주셨어요. 근데 저는 고된 훈련에 하도 데어서 콩나물 장사를 하더라도 민간인하고 해야지, 다시는 공무원이나 군대 일은 안 하겠다고 거절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곧바로 1979년 10·26과 12·12 사태가 났어요. 그때 소개받은 자리에 갔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 겁니다.

광화문에 주둔 중인 쿠데타군 1979.12.12 (Photo: 나무위키)

빵집에서 흘린 눈물

기자: 사모님과의 만남은요?

폴 임: 연애를 한 건 아니고, 제 고등학교 동창의 여동생이었어요. 네 살 차이 나서 저한테 오빠오빠 하던 동생이었는데, 커서 보니까 훌쩍 자랐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빵집으로 불러내서 ‘너 시집 안 가냐? 나한테 오면 어떠냐?’고 농담처럼 물었는데,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예요. 당황해서 농담이라고 둘러댔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오빠가 그런 얘기해서 놀라서 울었대요. 어쨌든 그 뒤로 밥도 먹고 하면서 제가 많이 꼬셨죠. 순둥이라 말도 잘 안 하던 애였는데 지금까지 제 곁을 잘 지켜주고 있네요.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오빠오빠’ 하던 여자아이는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는 ‘돕는 베필’이 되었다. 순둥이 사모님이 그는 참 고맙다.


맨해튼 야채가게를 뒤엎다

기자: 미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폴 임: 결혼하고 1982년에 빈손으로 미국에 왔어요. 아내보다 1년 먼저 들어와서 맨해튼 야채 가게에 150불 받고 취직했어요. 근데 한국에 다녀오겠다는 매니저는 돌아오지 않고, 가게는 개나 고양이 밥이 일반 식품이랑 같이 진열돼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죠. 손님들 불평이 하도 많아서 사장님한테 말했더니 저보고 바꿔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3일 동안 가게에서 자면서 싹 다 바꾸고 팻말도 다 붙여 놨어요. 헌병 출신답게 각 딱딱 맞춰서 기가 막히게 정리하니까 매상이 세 배나 오르는 게 아닙니까.

뉴욕 식료품점에서 아내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제가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어느 날 물건 배달하던 큰 유대인 회사 사장님이 저를 불렀어요. 돈을 벌려면 자기 가게를 차려야 한다며 브로드웨이 43가에 가게를 얻게 도와줬어요. 3개월 동안 비즈니스하는 법도 다 가르쳐 주고, 자본 없이도 코카콜라 같은 데랑 딜해서 10만 불어치 물건을 무료로 세팅하는 법을 알려줬죠.

오픈하자마자 장사는 대박이 났어요. 매일 8천 불, 만 불씩 현금이 들어오니까 저녁마다 회식하고 술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지요.

3일 동안 가게에서 잠을 자며 진열을 갈아엎던 청년. 군대에서 배운 ‘각 잡기’가 야채 가게 매상을 세 배로 올렸다. 그러나 손에 매일 1만 불씩 쥐는 그 재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다리 꼭대기에서 처음 부른 이름

기자: 그렇게 계속 승승장구하신 거예요?

폴 임: 아니요. 어느 새벽에 술에 취해서 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다리 꼭대기에 고장 나 세워 둔 차를 들이받았어요. 다리 밑으로 안 떨어져서 즉사는 면했는데, 하반신이 망가져서 애도 못 낳는 불구자가 됐습니다.

차에서 기어 나오는데 불신자 입에서 “하나님 아버지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더라고요. 매일 새벽 기도 다니시던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죠. 결국 가게 다 접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마이애미로 피신했어요.

기자: 마이애미에서 바로 교회를 가셨나요?

폴 임: 전혀요. 유명한 목사들이 전도하러 엄청 왔는데 동냥하듯 봉투에 돈을 쥐어 보냈어요. 순복음교회에 다니던 특파원 선배가 주말에 전도하려 찾아오면, 제가 토요일 밤에 술을 잔뜩 먹여서 주일에 교회 못 가게 방해했더랬죠.

이북 출신인 저희 어머니는 참 고집이 세셨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교회 갈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더니 파마도 안 하시고 계속 머리를 기르셨어요. 그러다 어느 날,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파마를 딱 하고 오시더니, 저를 놔두고 LA로 떠나시겠다는 거예요.

뭐 어쩌겠습니까. 아들로서 마지막으로 교회나 모셔다 드려야겠다 싶어 라이드를 해 드렸습니다. 예배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데, 문틈으로 ‘내 너를 지키리’ 찬송가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 순간 갑자기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기분이 이상해서 혼자 벽에 대고 “하나님, 믿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시면 믿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다리 꼭대기에서 살려 달라며 생전 처음 외쳤던 그 이름. 교회 문틈으로 새어 나온 찬송가 한 소절에 돌같이 굳어 있던 그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빗속의 배구 시합

기자: 몸은 회복이 되셨어요?

폴 임: 침례 받을 때 “이제 하나님 사람이니 하나님 위해 살게 내 몸 좀 치료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바로 그 주에 배구 대회가 있었는데 몸이 성치 않은데도 사람들한테 창피해서 말 못 하고 경기를 뛰었죠.

근데 경기 도중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빗속에서 배구를 하는 제 몸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을요. 제가 펄쩍펄쩍 뛰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 ‘하나님이 완전히 고쳐 주셨구나’ 싶어서 빗물에 눈물을 감추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기적은 계속됐어요. 뼈가 다 망가져서 애를 못 낳는 상태였는데 9년 만에 둘째가 딱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이 입양했냐고 오해할 정도였죠. 더욱 놀라운 것은 연년생으로 셋째가 보너스처럼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신 거지요.

자녀들 어린 시절 가족 사진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장대비 속에서 멀쩡히 뛰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며 펑펑 눈물을 흘린 그날, 그의 인생은 이미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카메라 한 대와 사도행전 28장

1988년 서울 올림픽,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990년 한국-소련 수교. 소련에도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기자: 러시아는 어떻게 가시게 된 거예요?

폴 임: 둘째 태어나고 신학교에 들어갔어요. LA 은혜한인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러시아 선교에 대한 비전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러시아 선교를 하려면 러시아에 대해 알아야 한다며 구소련에 현장 조사를 보내셨어요. 91년 무렵, 성령 충만해서 카메라 하나 들고 러시아 전역을 40일 동안 다니면서 비디오를 찍었습니다.

러시아 선교사 시절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막상 러시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정말 막막했죠. 사할린에서 첫날 과거 북한이 공산화되기 전에 평양에서 집사였던 분을 만났습니다. 찬송가를 종이에 직접 써서 풀로 먹이고 다려서 가지고 계셨어요. 저를 보시더니 살아생전에 자신이 선교사를 볼 줄은 몰랐다며 눈물을 많이 흘리셨어요. 그날 그분의 아들딸, 손주까지 모두 불러와 40여 명이 함께 찬송하고 그 집에서 묵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토록 사모함이 가득한 예배는 신앙생활 통틀어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러시아 말도 모르고 어디서 잘지도 몰랐던 저는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만 읽으면서 무턱대고 다녔어요. 근데 모스크바, 하바롭스크,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을 만나서 굶지도 않고 밖에서 잔 적도 없어요. 심지어 가는 곳마다 부흥회도 했습니다. 미국으로 귀국해서 그때 찍은 영상들을 3천 개 복사해서 쫙 뿌리고 나니 다시 러시아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식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이후 15년간 러시아에 머물렀지요.

다시 러시아에 들어왔을 때 한 번도 안 가 본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무작정 갔어요. 거기 공항에서 나중에 강수진 발레 단장 가이드했던 한국말 잘하는 분도 만나고, 당 간부 출신 김영홍 선생도 소개받아서 교회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 선생은 월간지 <고려 신문>을 만드는 신문사 사장으로, 공산당 치하에서 출판과 언론 쪽에 있으면서 한국도 다녀왔던 고려인 회장이셨어요. 통역자도 없고 성경책도 보급되지 않을 때라 제가 설교 대신 성경 구절 33개를 적으면 김영홍 선생이 러시아어로 그 구절을 적고, 제가 한국말로 읽으면 그분은 러시아어로 읽었지요. 그렇게 첫 교회를 개척하게 됐습니다. 개척 예배 때 50명 올 줄 알고 사과 50개를 준비했는데 세상에, 120명이나 오신 겁니다.

러시아 임마누엘 선교 센터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카메라 한 대, 사도행전 28장, 통역자 없는 설교. 그러나 사과 50개 앞에 120명이 앉았다. 사람의 계산을 넘어선 일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러시아 대부흥 1만 명 불씨

기자: 개척 교회는 점점 부흥이 되었나요?

폴 임: 사도행전을 경험하고 나니까 간이 커지더라고요. 93년도에 레닌그라드 실내 체육관을 빌려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사할린부터 알마타까지 15개 나라 성도들이 기차를 일주일씩 타고 다 모였어요. 처음에 2천 명 모이기로 했는데 나중엔 만 명이 된 거예요. 이들을 다 어디서 재우고 무엇을 먹이나. 막상 너무 많은 인원이 참석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더라고요. 다행히 여름방학이라 대학교 44개 기숙사랑 버스를 하루에 1불씩 주고 싹 다 빌릴 수 있었어요. 밥은 취사병 출신 집사님이 군용 솥을 구해 와서 음식을 하시고, 목수들이 만 명이 먹을 상을 다 만들었어요. 완전히 러시아판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죠.

1993년 레닌그라드 실내 체육관을 꽉 채운 1만 여명의 성도들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이 집회를 세 번 딱 하고 나니까 러시아 전역에 불이 붙고, 구소련 아래서 숨어 있던 목사님들이 자기 신분 다 밝히고 일어나더라고요.

당시 러시아 교회에는 아직 교단이 없었어요. 그래서 빨리 교단을 만들어야 했죠. 안 그러면 이단들이 들어올 테니까요. 김영홍 선생이 법대 출신이라 정관을 만들어 주셨고, 국가에서 인정받아 교단을 만들었어요. 저는 사양했지만 한사코 초대 회장을 맡아야 한다고 해서 1년만 맡다가 현지인에게 물려줬습니다. 또 러시아 목회자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신학교도 세웠지요.

러시아 선교 부흥 현장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이건 내가 아니야

기자: 사역은 순조롭게 잘 되셨어요?

폴 임: 교회에 성도가 한 200명 있을 때까지는 성도들 이름도 기억하고 자녀들까지 기억했는데, 천 명이 넘어서니까 모르겠더라고요.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 다니고 높은 사람들 만나는 일을 주로 하게 됐습니다. 직원들이 30여 명 되고 통역자도 한 다섯 명 있었어요. 어느새 큰 교회 목사, 유명 목사가 된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제가 옛날의 제가 아닌 거예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이건 아닌데 싶었죠.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그전까지 저는 열심만 다했습니다. 그냥 목숨 걸고 하나님 일한다 그런 단계였죠. 하지만 진짜 목사로 가는 단계는 따로 있더라고요. 제 열심 말고, 제 의무 말고요.

성도들의 이름을 잊은 자리에, ‘유명 목사’라는 호칭이 들어와 앉았다. 그가 그것을 알아챈 순간, 하나님은 한 여자아이를 그가 세운 신학교 문 앞에 두셨다.


엘레나 — 그를 무너뜨린 19살

마약을 금지했던 구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전역에 마약이 급속도로 퍼지던 시기, 목사로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폴 임: 어느 날 대학교수 집사님 한 분이 아이를 좀 도와달라고 찾아오셨어요. 데려온 아이는 19살, 너무 예쁜 아이였는데 눈이 마약에 중독돼 있었습니다. 엘레나라고 러시아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마약의 금단 현상이 뭔지도 몰랐어요. 중독자는 그 시간이 되면 찔러야 되고 먹어야 돼요. 안 하면 세상 말로 지랄 발광이 나요. 막 소리 지르고 욕하고. 그걸 하루에 서너 번 하는데 교회가 어떻겠어요? 예배 시간에 성가대 찬양하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욕을 해대고 난동을 부리기 일쑤였어요. 여자아이가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얼굴이 완전 마귀 얼굴로 변해서는 장정 둘이 붙들어도 안 되는 겁니다. 그걸 몇 달을 겪으니 교회가 아주 엉망이 됐죠.

제가 그래도 영권 있는 목사이고 메시지 전달도 잘하고 기도도 센데, 기도를 해도 안 되더라고요. 이건 뭐 성도들 볼 낯도 없고 권위가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왜 이런 애를 나한테 보내셨냐’고 하나님을 원망했죠.

근데 하나님은 정확하셨어요. 그 아이 하나를 통해서 교만해진 제 눈을 열어 영적인 사실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하신 거예요. 저는 그때까지 사단 마귀의 정체, 우리 인생을 훔치고 도둑질하고 죽이는 그 정체를 말로만 했지 실제 현상이 뭔지를 몰랐습니다. 설교는 기가 막히게 했지만 형식적이었던 거죠. 저는 모든 목회자들이 한 번씩은 엘레나 같은 친구를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 명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권위는 19살 소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때부터 진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됐다.


빗자루를 든 색시처럼

기자: 그래서 엘레나는 어떻게 됐어요?

폴 임: 금단 현상이 잠잠할 때는 말짱합니다. 마침 엘레나가 빗자루로 예배당을 청소하고 있는데, 색시처럼 얌전한 거예요. 그래서 “엘레나, 너 여기 좀 앉아 봐.” 했지요.

“너 오늘 죽으면 그렇게 소리 지르고 욕할 수 있니? 죽으면 끝이지? 지금 소리 지르고 그러는 거 어디서 나오냐? 몸은 죽으면 끝이잖아. 네가 지금 그러는 건 몸이 그러는 게 아니라 네 안에 있는 생각과 마음속에서 나오는 거다. 그걸 영혼이라고 해. 내가 몸 다 망가졌었는데 하나님이 살려 놓으셨잖아. 나 이걸 경험해서 러시아에 온 거야. 우리의 영혼을 누가 그렇게 흔드는 것 같니? 나쁜 게 하는 거야. 그게 사단이고 마귀야. 하나님이 힘이 세냐, 사단 마귀가 힘이 세냐?”

그랬더니 ‘하나님이 조금 세다’고 하더라고요. “조금 센 정도가 아니야. 네가 하나님 만나면 소리 지르고 이런 거 다 끝나는 거다.” 했죠.

“너 하나님 만나고 싶어?” 물으니 자기도 괴로우니까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 말을 따라 하라고 했죠.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참으로 죄인이었습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저를 구원하러 보내 주신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끝났어. 하나님 자녀야. 너 소리 안 질러.” 했는데, 저도 안 믿어지고 자기도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전도사들한테 시켰어요. 이 아이 붙들고 “내 몸에 붙은 마약 귀신들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 기도하라고요.

그렇게 14개월 만에 엘레나가 치유가 다 돼 버렸어요. 그리고는 신학교 청강생이 되었죠.

마귀의 얼굴이 되어 발광하던 입에서 “예수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온 후 14개월. 한 영혼이 살아나고, 한 사역의 방향이 통째로 바뀌었다.


전화기 앞에서 식은땀

폴 임: 신학교에 정식 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피 검사에서 마약기가 안 나와야 한대요. 보통 5년, 10년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엘레나는 성가대도 하고 정말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빨리 보건소 가서 증명서 받아서 학교 보내라.” 했죠. 다들 너무 이르다며 안 된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왜 목사님 말에 순종을 안 하냐”고 직원들 등 떠밀어 30분 떨어진 보건소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했죠. 그리고 검사 결과를 전화로 보고해 달라 했어요.

전화기 앞에 있는데 제가 얼마나 식은땀이 났겠어요. 그때는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한 게 아니라 저를 위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이 아이가 치유가 돼야 이 사역이 되지 않겠습니까. 검사에 마약 성분 안 나오게 해 주세요. 제발.”

잠시 후 전화벨이 울리는데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긴장된 전화는 처음 받았죠. 말도 못 했어요. 직원이 “아무것도 안 나왔습니다.” 하더라고요. 아이고…그때 제가 불신앙에서 벗어나서 염려하던 걸 다 내려놓고 정말 감사했어요. 신학교 청강생으로 들어갔던 엘레나는 결국 무사히 졸업하고, 마약 사역을 하는 전도사가 됐습니다.


신문 한 줄이 끌고 온 사람들

기자: 그 일이 학교까지 알려진 거군요.

폴 임: 이 아이를 회복시키는 과정을 보더니 그 대학 학장이 저에게 감사장을 보냈습니다. 때마침 그 학교가 대통령상 같은 걸 받아서 총장님이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이 지역에 유명한 마약 치유 전문가가 있다고 기자한테 저를 소개한 거예요. 그래서 기자가 찾아왔는데, 제가 무슨 마약 전문가인가요? 마약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데. 기도해서 치유했다고 할 수도 없어서 얼렁뚱땅 대충 대답을 했어요. 근데 이게 신문에 떡하니 난겁니다. 이후 저한테 문의가 오는 거예요. 그때부터 제가 마약 중독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졸지에 청소년 마약 예방 책임자가 됐습니다.

기자: 그 일로 목회의 방향이 바뀌셨겠네요.

폴 임: 교회를 둘러보니 애들이 20%밖에 안 되더라고요. 맨날 어른들 모아 놓고 헌금이나 걷으려던 걸 반성하고 가가호호 심방을 했어요. 애들 전도해서 데리고 나오니 교회가 완전 청년교회로 바뀌었어요.

교회가 계속 커지면서 교회를 다섯 개로 나눠서 부목사들을 목사로 다 세웠습니다. 각자 맡아서 하라고요. 저보다 더 잘해요. 제가 했을 땐 지교회가 8개였는데 지금은 140개가 넘으니까 저보다 더 잘하죠.

그즈음 학교 양호 교사들이 찾아오길래 진짜 근본은 영적 문제라고 복음 전하면서 치유해 줬더니, 그게 전도의 엄청난 무기가 되더라고요. 98년도에 마약 예방 센터를 세우고, 세종문화회관만 한 곳 빌려서 조용기 목사님 모시고 집회도 했는데, 그때 조 목사님이 저 같은 제자 한 명 세우고 이제 러시아 떠나라고 하신 말씀이 큰 깨달음이 됐습니다.

러시아 문 열리고 마약이 쫙 퍼지는데, 엘레나 치유할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건 치유가 아니라 예방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어요. 게다가 선교 규모가 커지니까 어느새 제가 대형 교회만 쫓아다니면서 돈 구하는 세일즈맨처럼 변해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서 애들을 살리는 예방교육에 전념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미국으로 귀국해 애틀랜타로 오게 됐습니다.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마약 전문가’가 됐다. 본인이 부인할 새도 없이 신문 한 줄이 그를 그 자리에 앉혀 버렸다. 그가 만든 길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는 크신 이의 설계였다.


5학년이 베이핑하는 나라

기자: 그렇게 코야드(COYAD)’가 시작된 거군요.

폴 임: 부모들은 애들 마약하는 거 10년 뒤에나 알아요. 엘레나가 마약을 하는 7~8년 동안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학교가 안전하다는 생각에 손을 놓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자녀가 뭘 하는지 도통 모르는 거죠. 근데 학교 안에서 애들끼리는 다 알거든요. 그래서 학교 안에 마약 예방 클럽을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감시하고 보호하도록 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귀넷카운티 코야드 본부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미국에 와서 보니까 40년 동안 마약 단속이랑 병원 짓는 데 어마어마한 돈을 썼는데 예방을 안 해서 다 실패했더라고요. 처음엔 지역 학교들이 안 받아줘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 귀넷 교육청의 한 위원을 통해서 스탈링 초등학교에 연결이 됐어요. 가 보니까 5학년짜리가 베이핑을 하길래 초등학교부터 예방 교육을 빡세게 시작했죠.

그가 알아낸 두 가지. 하나, 부모는 자녀의 마약을 10년 뒤에야 안다. 둘, 애들끼리는 학교 안에서 다 안다. 그렇다면 답은 학교 안 아이들 손에 있어야 했다.


한인 부모가 제일 무관심하다

기자: 한인 부모들의 마약 예방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요?

폴 임: 지금 연방 정부 그랜트도 신청해 놨고 기업 도네이션도 받으려고 해요. 학교마다 1천 불만 지원해 주면 애들이 클럽 돌리면서 엄청난 마약 예방 효과를 내거든요. 애들도 클럽 활동하려면 도너츠라도 한 박스씩 사 먹이고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근데 제일 안타까운 게 한인 부모들이에요. 우리 애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관심이 제일 없어요. 중국 커뮤니티가 이 코야드를 제일 잘해요. 코야드 거쳐간 학생들 보니까 고등학교 때 코야드 클럽 활동하면 좋은 대학도 잘 가고 장학금도 받고 직장에서도 스카우트해 가더라고요. 무엇보다 학교 내에서 마약을 파는 애들이 이 아이들을 안 건드니까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생긴다는 게 가장 유익하죠.


애틀랜타에서 세계로

기자: 지금 코야드가 어디까지 확장됐나요?

폴 임: 본부가 있는 애틀랜타에서 시작했는데, 조지아주에만 7개 지부가 있고요. 미국 전역으로는 20개 지부가 활동 중이에요. 워싱턴, 뉴욕, 시카고, 덴버, 로스앤젤레스, 달라스 등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2023년에 국회에서 ‘코야드 코리아’ 발대식을 했고요. 베트남은 정말 놀라운 게, 교육부 고위 관료가 국가 예산으로 모델 학교를 세우자고 먼저 제안을 해 왔어요.

코야드 폴 임 총재와 베트남 관계자들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기자: 다른 나라에서도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고요.

폴 임: 지금 약 20개 국가에서 코야드 프로그램을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있어요. 몽골은 차관이 직접 연락해 오고, 아프리카는 장관이 대학교에 아예 마약 예방학과를 세워 달라고 합니다. 말레이시아, 인도, 중국에서도 문의가 와요.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우리 아이를 지키고 싶다’는 부모 마음은 다 똑같더라고요. 다가오는 LA 올림픽을 클린 올림픽으로 준비하자는 국제적인 흐름도 있고요. 30년 동안 다듬어 온 이 시스템이 이제 세계 여러 나라의 학교 문 앞에 동시에 도착하고 있는 거죠.

코야드 아프리카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진짜 교회, 진짜 전도

폴 임: 큰 교회도 해 보고 신학교도 해 봤지만, 애들을 현장에서 살리는 이 코야드 클럽이 진짜 교회이고 전도예요. 저는 마약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코야드에 찾아오면 먼저 친구가 되어 주려 애씁니다. 그 애들이요, 부모 손에 억지로 이끌려서 이 교회 저 교회 다 가 보고, 목사들 기도와 뻔한 설교에 질린 아이들이에요. 그래서 절대 목사로서 아이들에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코야드 코리아 발대식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부모들도 인식을 바꾸셔야 해요. 쉬쉬하고 창피해할 게 아니라 아이를 낫게 해야 하잖아요. 마약 때문에 죽는 한인 아이들이 많습니다. 생떼 같은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잃을 순 없잖아요. 애들한테 무조건 죄인이라고 겁주지 말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복음을 전해서 보이지 않는 흑암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는 게 우리 부모들의 진짜 사명인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200번을 살아 돌아온 공군 아버지의 아들. 그 아들이 평생을 들여 만들고 있는 것은 한 장의 ‘쉴드’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는 강력한 방패.

어쩌면 그것은 식량 가방 두 개를 메고 가난한 이웃을 찾아다니던 아버지의 손길이 한 세대를 건너 다시 나타난 모습인지도 모른다. 불신자 아들이 교회 문턱을 넘는 날까지 머리카락 한 올 자르지 않고 버티셨던 어머니의 그 기도가 때에 맞춰 응답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헌병 시절의 곧은 자세와 충성된 마음 그대로,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아이들 앞에 서 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지금 써내려가고 계시는 신(新)사도행전. 그 페이지마다, 흑암을 빠져나와 다시 숨을 쉬게 된 영혼들의 이름이 한 줄 한 줄, 소리 없이 쌓이고 있다.


글. 이승은 (Eunice Lee) / InnerView. No.15 2026년 5월 13일

왼쪽부터 폴 임 코야드 총재와 아내 순 임, 팻시 오스틴 갯슨 귀넷 검찰총장, 임 총재 막내딸 / Photo courtesy of Paul B. Lim

Paul B. Lim (폴 임)

COYAD 총재 · 청소년 마약 예방가
청소년 마약 문제에 대한 사전 예방 시스템을 30년간 현장에서 구축·시행해 온 전문가. 현재 미국과 전 세계에서 마약 예방 사역을 이끌고 있으며, 검찰청과 협력하여 학생·학부모 대상 예방 교육과 캠페인을 정기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주요 약력
1954년 출생
1982년 미국 이주
19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마약예방센터 원장
2007년 미주 아세안 청소년 마약예방센터 원장
2019년 COYAD 청소년마약퇴치위원회 미 연방정부 허가
2022년 조지아주 의회 명예시민상 수상
2026년 조지아주 귀넷카운티 검찰청 커뮤니티 챔피언상 수상

코야드(COYAD)의 현장: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름만 들어서는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코야드(COYAD)는 ‘Community of Youth Against Drugs’의 약어. 직역하자면 ‘마약을 막아서는 청소년 공동체’다. 정의가 ‘공동체’인 단체. 그게 핵심이다. 그는 아이들을 ‘교육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동료’로 묶었다. 학교 안에 동아리(클럽)를 세우고, 그 클럽이 친구를 알아보고, 친구가 친구를 지킨다. 30년 가까이 그가 다듬어 온 시스템은 지금 미국 전역과 세계로 퍼지고 있다.

‘유스 세이프티 쉴드’ — 학교 안의 동아리

코야드의 심장은 학교 안 클럽인 ‘유스 세이프티 쉴드(Youth Safety Shield)’다. 매주 1시간씩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첫 20분간 마약 예방과 인성·리더십 교육, 나머지 40분은 태권도나 체조로 채워진다. 정규 수업으로 도입한 학교도 있고, 방과 후 수업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2019년에는 청소년 마약 예방 교육 기관으로서 노하우와 경험을 인정받아 연방 정부의 정식 허가도 받았다. 2020년 2월에는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원봉사상을 주관하는 단체로 백악관 자원봉사위원회로부터 공식 지정되었다. 클럽에서 자원봉사 시간을 채운 학생들은 연령별로 봉사 시간과 포상 종류에 따라 미국 대통령 친서, 증명서, 메달, 또는 뱃지 등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학교 측이 이런 프로그램을 도입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교육청, 학교 교장, 부교육감들이 코야드에 먼저 연락해 “우리 학교에 넣어 달라”고 요청하는 단계까지 왔다. 부모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녀가 왕따나 학교 폭력, 마약, 총기 문제로 늘 걱정인데, 코야드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으니 안심하는 것이다. 게다가 교육 자체로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부모와 매일 30분이라도 대화하도록 유도한다. 총재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마약이나 중독 문제는 99%가 부모의 문제예요. 아이들을 학교 보내 놓고 뭘 하는지는 관심이 없거든요.”


캠프·캠페인·센터 — ‘3C 토탈 시스템’

코야드의 전략은 ‘3P’와 ‘3C’로 요약된다. 3P는 플레이스(Place·모든 장소), 프리벤션(Prevention·예방), 플랫폼(Platform·플랫폼). 이것을 ‘3C’ 토탈 시스템에 적용한다. 캠프(Camp), 캠페인(Campaign), 센터(Center). 캠프는 직장이든 학교든 모든 장소가 다 캠프라는 의미이고, 캠페인은 한 달에 한 번씩 관계 맺은 기관·단체와 연합하여 캠페인을 하자는 의미다. 센터는 이러한 지도자나 전문가들을 교육하는 기관으로서 청소년 리더들을 키워내는 곳이다.

학교에서 동아리 형식으로 진행하려면 리더가 있어야 하는데, 그 리더들은 계속 센터에 와서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그 교육을 코야드 자체에서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FBI, 검찰, 경찰, 경제학자, 의사 등 각 분야의 멘토들을 초대해서 함께 진행한다. 이것을 ‘코야드 유스 포럼(COYAD Youth Forum)’이라고 한다. 각 나라마다 문화와 언어가 서로 통하는 지역을 묶어 세계를 10개 지역으로 나누었고, 미국은 행정적으로 9개로 나누어 현재 워싱턴, 뉴욕, 시카고, 덴버, 로스앤젤레스, 달라스 등에서 진행되고 있다. 본부는 애틀랜타, 조지아주에만 7개, 미국 전역으로는 20개 지부에서 활동 중이다.

한국, 그리고 세계로 — 코야드 코리아

총재가 5년 전부터 한국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한 이유는 분명하다. 마약 청정국이라 불리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면서 카르텔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침묵하고, 신학교에는 마약 중독 대처 과목이 없다. 그는 전국신학대학협의회 김윤희 총장을 만나 신학교에 마약 예방 교육 과정을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코야드는 2023년 11월 13일 국회에서 코야드 한국 지부, 코야드 코리아(COYAD KOREA) 발대식을 가졌다. 발대식 전까지 한 달 반 동안 전국의 지부를 방문하는 ‘로드쇼’를 통해 현장 인력들과 직접 만나 코야드 시스템을 설명했다. 또한 코야드는 국기원 세계태권도협회 이사장과 MOU를 체결했다. 세계태권도협회는 210개국에 진출해 있고, 코로나 팬데믹 때 미국 내 2만 개 태권도장 중 1만 2천 개가 파산했지만, 코야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도장은 살아남았다.

지금 약 20개 국가에서 코야드 프로그램을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있다. 몽골은 차관이, 아프리카는 장관이 대학교에 마약 예방학과를 세워 달라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교육부 고위 관료가 국가 예산으로 모델 학교 세우자고 먼저 제안한 상태다. 마약 예방은 더 이상 한 단체의 사역이 아니라 ‘다가오는 LA 올림픽을 클린 올림픽으로 준비한다’는 국제적 의제가 되어 가고 있다. 그가 평생 다듬어 온 한 가지가 이제 세계 여러 나라의 학교 문 앞에 도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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