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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의 착각

기적은 시스템이 아니었다

1%의 제국

1908년 이후, 영국 사이클은 100년 가까이 올림픽 금메달을 단 하나밖에 따지 못했다. 투르 드 프랑스에서는 110년 동안 우승자가 한 명도 없었다. 어찌나 형편없었던지, 유럽의 한 정상급 자전거 제조사는 브랜드에 흠이 갈까 두려워 영국 대표팀에 자전거 파는 것을 거절할 정도였다.

2003년, 데이브 브레일스포드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선수들의 장비를 싣는 트럭 내부를 흰색으로 칠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바닥에 떨어진 먼지 한 톨까지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였다. 먼지가 체인에 끼면 마찰이 생기고, 마찰은 0.1초를 갉아먹는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타이어 접지력을 높이려 알코올로 타이어를 닦았고, 선수마다 가장 잘 맞는 베개와 매트리스를 따로 챙겨 수면의 질을 높였으며, 감기 한 번에 시즌이 무너지지 않도록 의사를 불러 손 씻는 법까지 가르쳤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게 메달과 무슨 상관이냐고. 브레일스포드의 대답은 ‘미미한 이득의 누적(marginal gains)’이었다. 모든 과정을 잘게 쪼개 1%씩만 나아지면, 그 1%들이 쌓여 결국 격차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임 5년 뒤, 팀은 2008년 베이징에서 금메달 8개를 쓸어 담았다. 2012년 런던에서는 올림픽 신기록 9개와 세계 신기록 7개를 세웠고, 사상 처음으로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를 배출했다. 그는 영국 스포츠 역사를 바꾼 공로로 201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직접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Photo: Sir Dave Brailsford. Illustration by Frame.
Source: Le Tour de France Instagram.

그 여름, 거리는 붉었다

2002년 6월, 한 달 내내 한반도가 멈췄다. 폴란드를 꺾고 월드컵 출전 48년 만의 첫 승을 거뒀고, 포르투갈을 넘어 16강에 올랐다. 세계 최강 이탈리아와 만난 16강전, 한국은 후반 막판 수비수를 모두 빼고 공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연장 종료 직전, 안정환의 머리에서 골든골이 터졌다. 8강 스페인전은 승부차기까지 갔다. 골키퍼 이운재가 상대의 킥을 막아냈고, 마지막 키커로 주장 홍명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공을 골망에 꽂는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아시아 최초의 4강이 열렸다.

Photo: 2002년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홍명보 선수 Source:Wikipedia

경기장 밖에서는 또 다른 물결이 일었다. 폴란드전 35만 명으로 시작된 거리응원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불어났고, 독일과의 준결승 날에는 7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온 나라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광장을 메웠다. 낯선 사람과 어깨를 걸고 “대~한민국”을 외쳤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것은 축구 응원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한 세대의 자신감이었다.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네덜란드인 거스 히딩크가 있었다. 그는 학연도 지연도 보지 않았다. 오직 기량만 보고 무명의 박지성을 발탁했고,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는 말로 정신력을 담금질했으며, 90분 내내 지치지 않는 체력과 압박 축구를 이식했다. 달리고 또 달려 이뤄낸 4강이었다.

Photo: Guus Hiddink. Illustration by Frame.

24년의 착각

2002년 이후, 한국 축구는 스스로 도달했다고 믿었다. 세계의 벽을 넘었으니 이제 강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때 유럽은 차범근 한 사람의 무대였다. 1980년대,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통산 98골을 넣으며 외롭게 길을 닦았다. 2002년이 그 길을 넓혔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맨체스터와 런던으로 건너갔고, 기성용과 손흥민이 뒤를 이었다.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토트넘을 17년 만의 우승으로 이끈 뒤 미국으로 떠났다. 그 사이 후배들이 유럽의 심장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강인은 파리 생제르맹, 김민재는 바이에른 뮌헨, 황희찬과 이재성도 빅리그를 누볐다. 한 명이던 것이 한 세대가 되었다. 유럽 빅클럽에서 뛰는 선수가 이렇게 많은데, 우리가 약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2002년의 기적은 한 명의 외국인 명장이 2년간 모든 것을 갈아엎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 방식은 끝내 제도로 남지 않았다. 감독이 바뀔 때마다 철학이 바뀌었고, 잊었던 학연과 인맥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대한축구협회(KFA)의 행정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을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홍명보였다. 결과는 1무 2패, 조별리그 탈락. 협회는 그것을 시스템의 붕괴로 읽지 않았다.


같은 6월, 두 장면

2026년 6월 24일, 멕시코 몬테레이. 한국은 남아공과 비기기만 해도 자력으로 토너먼트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조에서 가장 약하다던 상대였다. 그런데 주장 손흥민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라운드 위의 한국은 느렸고, 지고 있는데도 공은 자꾸 골문 반대쪽으로, 뒤로만 돌았다. 정작 상대 페널티 박스 안에는 한국 선수가 없었다. 후반, 수비의 핵 김민재를 뺀 것이 악수였다. 손흥민에게 온 슈팅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휘슬이 울렸을 때 점수는 0-1. 미국 언론은 “매우 실망스럽다”는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FIFA 세계랭킹도 32위로 떨어졌다.

Photo: Son Heung-min after South Korea’s loss to South Africa and Japan’s advancement to the Round of 32.
Illustration by Frame.

일본은 정반대의 장면을 그렸다. 튀니지를 4-0으로 꺾었다. 일본의 월드컵 사상 최다 점수 차 승리였다. 전반 4분 카마다의 선제골에 이어 우에다가 두 골, 이토 준야가 하나를 더했다. 그중 도미야스에서 시작돼 우에다의 원터치를 거쳐 이토의 발끝에 꽂힌 골은 이번 대회 최고의 골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강호 네덜란드와는 2-2로 비겼고, 39세의 나가토모 유토가 그라운드를 밟아 아시아 최고령 월드컵 출전 기록을 새로 썼다. 32강 브라질전에서 일본은 선제골로 앞서고도 후반 추가시간에 결승골을 내주며 2-1로 역전당했다. 강호를 끝까지 몰아붙인 석패였다. 미국 언론은 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준 일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다른 길을 걸었다

일본의 선전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 축구협회는 2050년 월드컵 우승이라는 장기 비전을 세우고, 유소년부터 일관된 전술 방향성을 체계적으로 확립했다. 감독이 바뀌어도 철학은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했다.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8년째 대표팀을 지휘하고 있고, 2030년까지 가면 일본 축구 사상 첫 12년 장기집권이 된다. 우리가 4년마다 감독과 철학을 갈아엎는 동안, 그들은 한 방향으로 1%씩 쌓아 올렸다.

브라질전을 앞두고 모리야스 감독은 말했다.

우리는 아직 정상에 도달한 적 없지만, 역사를 바꿀 수 있다.

Photo: Japan head coach Hajime Moriyasu.
Source: FIFA World Cup.

데자뷔 입장문

한국의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직후, 멕시코 과달라하라 베이스캠프. 홍명보 감독이 준비한 입장문을 읽고 고개를 숙였다. “사퇴하겠습니다.” 2024년 7월 부임해 2027년 아시안컵까지였던 계약은 탈락 앞에서 방패가 되지 못했다.

숫자는 잔인했다. 한국은 개최국 멕시코, 체코, 남아공과 묶여 ‘최상의 조편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체코를 2-1로 꺾고 출발했지만, 멕시코에 0-1, 남아공에 0-1로 무너졌다. 1승 2패, 조 3위. 3위 12팀 중 10위로 밀려 토너먼트행 막차를 놓쳤다. 48개국 중 최종 34위였다.

2002년 스페인전 마지막 키커였던 그 주장이, 2014년에 이어 두 번째 조별리그 탈락을 떠안고 불명예 퇴진했다. 현직 대통령까지 무능한 지휘관을 뽑으면 결과는 뻔하다는 취지로 공개 비판에 나섰다. 기적의 주역이 실패의 얼굴로 돌아오는 잔인한 대칭이었다.

Photo: Hong Myung-bo announces his resignation.
Source: Yonhap TV screenshot.

네 일을 하라

2007년 1월, 오랜 침체에 빠진 미식축구 명문 앨라배마 대학에 새 감독 닉 세이반이 부임했다. 팬들은 우승을 요구했고, 언론은 언제 다시 왕조를 세우느냐고 물었다. 세이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는 우승을 말하지 않았다. 라커룸에 챔피언십 구호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단 한마디만 반복했다. “네 일을 하라(Do your job).”

풋볼의 한 플레이는 평균 6~7초에 불과하다. 그는 다음 경기도, 다음 쿼터도 말고 지금 시작되는 7초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블로킹 하나, 태클 하나, 패스 하나. 그 작은 성공이 쌓이면 승리는 따라온다고 믿었다. 그는 이 철학을 ‘더 프로세스(The Process)’라 불렀다.

결과는? 17년간 6번의 전국 챔피언이었다. 수백 명의 선수가 졸업하고 코치들이 떠나는 사이에도 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만든 것은 한 명의 전설이 아니라, 누가 들어와도 같은 기준으로 움직이는 라커룸이었다.

Photo Credit: University of Alabama Football website

108년을 끝낸 5년

시스템은 라커룸 밖에서도 자란다. 1908년 마지막 우승 이후, 시카고 컵스는 108년 동안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 사이 감독은 수십 번 바뀌었고 스타도 수없이 거쳐 갔다. 돈을 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번 중요한 순간에 무너졌다.

2011년, 보스턴의 86년 저주를 끝냈던 테오 엡스타인이 야구 운영 사장으로 부임했다. 팬들은 당장의 우승을 원했지만 그는 다른 길을 갔다. 베테랑을 내보내고 유망주를 모았으며, 마이너리그 육성과 스카우트, 데이터 분석 부서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다. 성적은 오히려 더 나빠졌고, 언론은 실패라 썼다.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한 시즌이 아니라, 계속 이기는 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5년 뒤인 2016년, 컵스는 마침내 우승했다. 한 명의 스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시 지어진 조직이 108년을 끝냈다.

Photo: Theo Epstein, former Chicago Cubs President of Baseball Operations. Source: Wikipedia

간섭이 멈춘 자리

1980년대 말, 양키스는 가장 비싼 팀이었지만 가장 강한 팀은 아니었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감독을 반복해서 갈아치웠고, 영입과 현장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 돈은 썼지만 방향은 자주 바뀌었다. 1978년 이후 우승은 없었다.

1990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스타인브레너에게 구단 운영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다. 뜻밖에도 양키스는 그때부터 조용히 달라졌다. 프런트는 더 긴 호흡으로 움직였고, 마이너리그로 눈을 돌렸다. 그 시간 동안 데릭 지터,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 호르헤 포사다가 성장했다. 훗날 ‘코어 포(Core 4)’라 불리게 되는 선수들이다. 간섭이 멈추자 시스템이 자라났다. 양키스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네 번 우승했다. 같은 돈이 투입됐지만 다른 조직으로 거듭났다.

Photo: The Yankees’ Core Four in 2015. From left: Andy Pettitte, Jorge Posada, Mariano Rivera, and Derek Jeter.
Source: Wikipedia.

면접도 보지 않았다

한국에선, 그 간섭이 멈춘 적이 없었다. 2024년 클린스만 경질 뒤, 협회는 유럽까지 사람을 보내 다비드 바그너와 거스 포옛을 면접했다. 바그너는 50장짜리 PPT를 펼쳤다. 상대별 전술, 후보 선수 50명의 명단, 한국 상주 의사까지. 전력강화위 표결에서 그는 홍명보보다 한 표를 더 받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면접도 발표도 하지 않은 홍명보였다. 두 외국인 감독은 기자회견 중계로 자신의 탈락을 접했다. ‘날치기 선임’이었다.

이 모든 일의 꼭대기에는 13년간 협회를 이끌어 온 정몽규 회장이 있다. 견제 없는 4선 장기집권 아래 이사회는 5년간 안건 하나 부결시키지 못했고, 감독 선임은 번번이 회장의 독단으로 흘렀다. 그 사이 대표팀의 역량과 전문성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한때 한국 감독 후보로 거론됐던 제시 마치는 이번 월드컵에서 개최국 캐나다를 사상 첫 16강에 올려놓으며 돌풍을 이어 가고 있다. 반면 홍 감독은 성난 팬들의 고성과 야유 속에 경찰 160여 명이 에워싼 인천공항 입국장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통과했다. 일부 팬들은 ‘시간차’로 뒤따라 들어온 정몽규 회장에게 ‘개껌’을 던지기도 했다.

Photo: 정몽규 회장 / Source: Wikipedia

Now / What’s Next

한국 국민이 실망한 진짜 이유

한국 국민들은 실수에 관대하다. 더 강한 상대에게 무너지는 것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단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만은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은 축구만의 기준이 아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를 세운 이 나라가 스스로를 버텨 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유니폼이 특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클럽에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 뛰지만, 국가대표가 되면 이름보다 먼저 국기가 가슴에 올라온다. 그래서 국민들은 화려한 드리블보다 끝까지 따라가는 한 걸음을, 골보다 먼저 몸을 던지는 태클을 기억한다. 승리를 넘어 마지막 휘슬까지 뛰는 태도를 사랑한다.

2026년의 실망은 결국 점수표의 문제가 아니다. 최상의 조편성과 황금세대를 손에 쥐고도 시스템도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는 의심, 그것이 분노의 뿌리다. 한국인에게 태도는 곧 자긍심이자 자부심이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무대에서, 그 민낯은 전 국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분노의 더 깊은 과녁은 한 사람의 감독이 아니라, 24년간 기적을 기다리며 시스템 대신 그들만의 리그로 파멸을 몰고 온 협회 그 자체다.

한때 어느 자전거 회사도 거래를 꺼리던 영국 사이클은 흰 트럭 바닥의 먼지 한 톨부터 시스템을 쌓아 세계 최강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세계가 탐내는 선수들이 있다. 없는 건 그들을 담을 그릇 하나다.


글. 이승은 (Eunice Lee) / Frame. No.22 2026년 7월 1일

Photo: 붉은악마의 입장문 Source: 붉은악마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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