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다 바꿔라, 그리고 남겨라

1995년 3월, 경상북도 구미.

삼성전자 공장 마당에 2천 명의 직원이 모였다. 그들 앞에는 방금 만든 휴대전화와 팩스, 무선전화기 15만 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머리에는 ‘품질확보’라고 쓴 띠를 둘렀다.

누군가 불을 붙였다.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제품이 눈앞에서 타올랐다. 멀쩡해 보이는 것까지 망치로 부수고 불 속에 던졌다. 재가 된 물건의 값은 약 5천만 달러어치.

그 광경을 한 남자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좀처럼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회의에서 몇 시간을 듣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한마디만 남기고 나가는 일이 많았다. 언론 앞에도 자주 서지 않았다.

그런 그가, 15만 대의 휴대전화를 불태우며 전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불량은 제품이 아니다. 회사의 수치다.

이건희, 삼성의 2대 회장. 그는 물려받은 회사를 다시 짓는 중이었다.

Photo: Samsung Electronics employees burn 150,000 mobile phones at the company’s Gumi plant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March 1995.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말이 없는 아이

이건희는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셋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키우던 시절, 어린 그는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자랐다. 1953년에는 열한 살의 나이로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뒷날 와세다에서 상학을, 미국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배웠다.

낯선 나라에 홀로 떨어진 그는, 말보다 관찰이 앞서는 사람이 되어 갔다.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사다가 뜯어 보곤 했다.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그들이 만든 물건에는 사람의 손끝이 남긴 정성이 있었다. 나사 하나, 마감 한곳에도 그것이 보였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중고차를 사서 몇 달 몰다가 완전히 분해해 다시 조립한 뒤 되팔았다. 4천 달러 남짓에 사서 700달러를 남긴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여섯 대를 뜯고 고쳤다. 그는 물건을 겉만 보지 않았다. 안을 열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봤다.

기업의 수준은 회장의 말이 아니라, 제품의 속과 마감에서 드러난다. 뜯어보는 습관이 그에게 남긴 결론이었다.

Photo: Lee Kun-hee as a child.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반도체라는 도박

1970년대, 삼성 내부에서는 반도체를 놓고 걱정이 많았다. 막대한 돈이 들었고, 미국과 일본의 기술은 넘볼 수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삼성은 승부를 걸었다. 1983년, 대규모 반도체 진출을 선언했다.

돈이 되는 것을 좇으면 이미 늦는다. 남들이 돈이 된다는 걸 아는 순간, 그곳은 이미 붉은 바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반도체는 돈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희가 본 것은, 이 작은 물건이 언젠가 세상의 모든 기계 안으로 들어가리라는 미래였다.

값이 폭락하면 대부분의 기업은 겁을 먹고 투자를 줄였지만, 삼성은 오히려 그때 공장을 지었다. 겨울에 앞서 걷는 자만이 봄에 홀로 서 있을 수 있다고 했던가.

1992년, 삼성은 세계에서 메모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회사가 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한 세대를 거쳐 이어졌다. 2026년에도 삼성은 세계 D램 시장의 선두에 서 있다. 점유율은 약 38퍼센트. 돈이 되지 않던 시절에 건 도박이, 그렇게 증명된 셈이다.

Photo: Samsung’s 3D architecture vision unveiled at FMS 2026. Source: Samsung.com.

회장이 되던 날

1987년 11월, 이병철이 세상을 떠났다. 그해 12월, 마흔다섯의 이건희가 회장에 올랐다.

취임사에서 그는 도전적인 경영으로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제2의 창업’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가 물려받은 삼성은 한국에서는 거인이었지만 세계에서는 아직 값싼 아시아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에 가까웠다.

크다는 것과 좋다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지금 잘된다는 것이 앞으로도 잘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매출이 아니었다. 품질이었고, 브랜드였다.

당시 세계 매장에서 삼성 제품과 소니 제품을 나란히 놓으면, 사람들은 소니를 집었다. 같은 값이면 소니, 조금 비싸더라도 소니였다.

값으로 이긴 자리는 더 싼 누군가가 반드시 빼앗아 간다. 이건희는 그 자리가 오래 갈 수 없음을 알았다.

훗날 그는 한 에세이에 이렇게 적었다. “변화 속에는 기회와 위기가 항상 같은 크기로 존재한다.”

물려받은 것을 단순히 지키려고만 하는 사람은 결국 잃는다. 성장하려면, 바꿔야 했다.

Photo: Lee Kun-hee, who became chairman of Samsung in December 1987 at the age of 45.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프랑크푸르트

1993년, 이건희는 해외에서 삼성 제품과 경쟁사 제품을 직접 비교했다. 현장에서 불량 세탁기 부품을 칼로 깎아 억지로 맞추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그에게 전달됐다.

부품이 맞지 않으면 칼로 깎아서 끼웠고, 그것을 문제라 여기지도 않았다. 돌아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 장면을 보고 그 자리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이건희는 핵심 경영진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삼성의 역사를 가르는 한 문장이 나왔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 신경영이었다. 핵심은 단순했다. 양보다 질. 많이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만드는 기업이 되라.

Photo: Lee Kun-hee delivers his “New Management” declaration in Frankfurt, Germany, in 1993.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불량은 암이다”

그는 임원들에게 매출 목표를 묻지 않았다. 대신 ‘업(業)의 개념’을 물었다. 당신이 하는 사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시계는 정밀기계인가, 아니면 패션인가. 본질을 모르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삼성을 병든 회사로 봤다.

“불량은 암이다. 자칫하면 말기에 들어갈 수 있다.”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다고, 그는 질타했다.

무서운 것은, 그 병을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불량이 나와도 라인은 돌고, 월급은 나오고, 회사는 굴러간다. ‘이만하면 됐다’는 감각이 조직을 덮고 있었다.

100만 개를 만들어 10만 개가 불량이면, 그것은 90만 개를 만든 것이 아니다. 회사를 90만 번 속인 것이다.

그 생각을 조직의 뼛속까지 새기는 데, 그는 몇 년을 썼다.

Photo: Samsung Chairman Lee Kun-hee.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천재 한 명

신경영은 기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21세기의 경쟁력은 디자인이라고 강조해 왔고, 1995년 삼성디자인교육원을 설립했다.

기능은 언젠가 평준화되지만, 디자인은 브랜드로 남는다고 봤다.

사람에 대한 생각은 더 단호했다. 2003년, 그는 인재를 강조하며 말했다.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

평범한 사람 열 명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을, 뛰어난 한 사람이 만든다. 그런 사람을 데려오는 데 드는 돈은 비용이 아니라 미래였다.

인텔과 IBM에 있던 한국인 기술자들을 데려와 반도체에서 성공을 맛본 뒤, 그는 사람 하나가 사업 하나를 일으키는 것을 직접 봤다.

2002년부터 그는 계열사별 핵심 인재 확보 실적을 매달 보고받았고, 사장을 평가할 때 인재 영입을 절반 가까이 반영했다. 좋은 사람을 데려오는 일은, 사장의 재량이 아니라 의무였다.

그는 일본을 더 싸게 베끼는 것으로는 1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베끼는 자는 영원히 뒤를 따른다. 넘어서려면 우리만의 것이 있어야 했고,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

Photo: Lee Kun-hee with his father, Samsung founder Lee Byung-chul.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소니를 넘어서

1997년,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쳤다. 많은 대기업이 무너졌고, 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수많은 직원이 정리해고됐다.

그러나 위기의 반대편에서, 삼성은 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텔레비전, 휴대전화에서 경쟁력이 올라섰다.

결국 2006년, 삼성은 세계 텔레비전 시장에서 소니를 앞섰다.

한국 전자업체가 소니를 넘어서리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던 시절, 그 일이 일어났다.

이건희는 기뻐하기보다 조심스러워했다.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며, 쫓을 때는 목표가 보이지만 쫓기게 되면 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삼성이 가장 잘 나갈 때, 그는 위기를 말했다. 지금 우리를 먹여 살리는 제품이 10년 뒤에는 사라질 수 있다고. 그의 경영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위기의식.

Photo: In 2006, Samsung surpassed Sony to become the world’s leading television brand.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바꿀 수 없었던 것

삼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동안, 그림자도 함께 자랐다. 재벌의 지배구조, 정경유착, 경영권 승계, 비자금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그는 시스템을 향해 날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와 권위주의를 겨냥한 말이었다.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고, 삼성은 그 대가를 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를 4류라 부른 그는 정치와 가장 깊이 얽힌 기업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늘은 노동자에게도 드리웠다. 오래 고수한 무노조 경영, 노조를 와해한 혐의로 유죄를 받은 임원들, 반도체 공장에서 병을 얻어 숨진 이들이 그 뒤에 있었다.

2008년, 그는 비자금 사건으로 기소됐다.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았고, 2010년 회장으로 돌아왔다.

삼성의 모든 것을 바꾸려고 했던 그도 끝내 바꾸지 못한 것 — 한국의 대기업은 한 시대의 방식 위에 세워졌다. 그 방식은 삼성을 여기까지 끌고 온 힘인 동시에, 두고두고 답해야 할 짐이기도 하다.

Photo: Lee Kun-hee announces his resignation as Samsung chairman in 2008 following the slush fund scandal.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침묵

그가 회장이 되던 1987년, 삼성은 일본 기업을 쫓던 회사였다. 그러나 사반세기 뒤, 삼성은 반도체, 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 분야에서 세계와 겨루는 거물이 됐다.

그 시기, 2014년 5월, 이건희가 쓰러졌다.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경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에서 가장 말이 적던 경영자가, 완전한 침묵으로 들어갔다.

아들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그룹의 총수 역할을 맡았고, 그렇게 6년이 흘렀다.

2020년 10월 25일, 그는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

유족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약 12조 원의 상속세를 냈다. 그리고 아들 이재용은 아버지를 넘어서겠다는 ‘승어부(勝於父)’를 말했다.

Photo: The hearse carrying the late Samsung Chairman Lee Kun-hee on October 25, 2020. Source: KBS Documentary Insight: Lee Kun-hee, Legacy of a Giant, video screenshot.

거인의 유산

2026년 여름, 시카고 미술관 특별 전시실에 세계 각지의 관람객이 빼곡히 들어찼다.

《Korean National Treasures: 2,000 Years of Art》.

40년 만에 미국에서 열린 가장 큰 한국미술전으로,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을 거쳐 온 작품들이었다.

Photo: Visitors view works on display at Korean National Treasures: 2,000 Years of Art, a special exhibition at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July 2026. Photo by Eunice Lee / America K.

조선의 백자와 병풍, 불화, 그리고 한국 근현대 회화가 품격 있고 세련되게 전시됐다. 관람객들은 매 작품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했다.

삼성의 제품과 로고가 전혀 없는 그 공간에는, 이건희의 또 다른 정신이 서려 있었다.

2021년, 유족은 그가 평생 모은 미술품과 문화재 2만 3천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국보와 보물에서 겸재 정선, 김홍도, 김환기, 박수근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의 수장고가 국민의 것이 되었다. 삼성 주식만 남긴 것이 아니라, 2천 년의 한국의 시간을 다음 세대에게 남겨 준 것이다.

Photo: Korean National Treasures: 2,000 Years of Art, a special exhibition at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July 2026. Photo by Eunice Lee / America K.

그는 한 기업이 세계의 기준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한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남들이 돈이 된다고 말할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크다는 것은 안심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많이 만드는 것보다, 가장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겨울에 앞서 걷는 자만이 봄에 홀로 선다.

가장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천재 한 사람의 값은 십만 명과 같다.

그리고 남는 것은 회사가 아니라 시대다.

정상에 오르고 싶은가?

다 바꿔라. 그리고 남겨라.


글. 이승은 (Eunice Lee) / InnerView. No.27 2026년 8월 13일

편집자 주: 이건희 회장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아끼고 방송 인터뷰에도 거의 나서지 않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글과 발언으로 적잖이 남겼다. 이 원고의 따옴표 안 문장은 그의 실제 어록에서 가져왔으며, 발언 시점은 본문에 밝혔다. 주요 근거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1995년 베이징 발언, 그리고 1997년 동아일보 연재를 묶은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다. 그 밖의 서술은 공개된 기록과 그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으며, 비자금 사건과 특별사면 등 사법적 사실관계는 공개된 기록에 따랐다.

Photo: A quote by the late Samsung Chairman Lee Kun-hee displayed on the wall of the special exhibition Korean National Treasures: 2,000 Years of Art. Photo by Eunice Lee / America K.

Published inInn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