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7분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5분, 플로리다주 새러소타의 에마 부커 초등학교 2학년 교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작은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일곱 살, 여덟 살짜리들이 소리 내어 읽던 이야기의 제목은 「애완 염소」였다. 교실 뒤편에서는 취재진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비서실장 앤드루 카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대통령의 오른쪽 귀에 몸을 기울여 몇 마디 속삭이고는 곧바로 물러섰다.
“두 번째 비행기가 두 번째 빌딩에 충돌했습니다. 미국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부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은 한 점에 박혔고, 입술은 굳게 닫혔다. 카메라는 그 표정의 변화를 초 단위로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읽었고, 교실은 낭독 소리로 가득했다.
부시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렇게 7분이 흘렀다.

I can hear you
사흘 뒤인 9월 14일 오후, 뉴욕 그라운드 제로.
잔해 더미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소방관과 구조대원 수백 명이 온몸을 회색으로 뒤집어쓴 채 폐허 위를 오갔다.
부시가 불에 탄 소방차 위로 올라섰다. 누군가 확성기를 건넸다. 그가 입을 열자 뒤쪽에서 외침이 날아왔다.
“안 들려요!”
부시가 그쪽을 돌아봤다.
“나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전 세계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을 무너뜨린 자들도, 머지않아 우리 모두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I can hear you! The rest of the world hears you! And the people who knocked these buildings down will hear all of us soon!)
폐허 위에서 “USA! USA!” 함성이 터졌다. 일주일 뒤 부시의 지지율은 90%를 찍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대통령 지지율 가운데 하나였다.

벙커 속의 부통령
9·11 당일, 백악관 지하 비상작전센터에서 대응을 지휘한 사람은 딕 체니 부통령이었다.
체니는 백악관 비서실장, 하원의원, 국방장관, 대기업 CEO를 모두 거친 워싱턴 최고의 실력자였다. 그런 그가 10여 년 전에는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국방장관이던 체니는 바그다드까지 밀고 들어가 후세인을 제거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이유는 두 개의 질문이었다. 정권을 무너뜨리면 그다음 이라크는 누가 통치하는가. 미군은 얼마나 오래 발이 묶이는가.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9·11이 그 질문을 지웠다. 체니의 새 원칙은 이랬다. 위협이 현실이 될 확률이 단 1%라도, 결과가 재앙적이라면 확실한 위험처럼 다뤄야 한다. 훗날 ‘1% 독트린’¹이라 불린 사고방식이다.
9·11을 저지른 것은 알카에다였다. 그러나 미국이 겨눈 것은 이라크였다.
2002년 8월 26일, 내슈빌 해외참전용사회 연설장. 체니가 마이크 앞에 섰다.
“간단히 말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졌고 핵무기를 손에 넣으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정보기관 내부의 판단은 하나로 모여 있지 않았다. 체니는 그 불확실한 첩보를 확정된 사실처럼 말했다.
최종 결정권자는 여전히 부시였다. 다만 그가 결정을 내릴 무렵, 판단의 지형은 이미 그려져 있었다.
¹ 1% 독트린: 공식 정부 방침으로 선포된 적은 없다. 체니의 국가안보관을 압축한 표현으로 통용된다.

신발로 때린 얼굴
2003년 3월 20일 새벽, 바그다드 상공이 붉게 물들었다.
CNN 카메라가 도심 폭격을 실시간으로 내보냈다. 세계는 그것을 “충격과 공포”라 불렀다. 침공 나흘 전, 체니는 방송에 나와 미군이 이라크인들에게 해방자로 환영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 9일, 바그다드 피르도스 광장. 미군 장갑차가 후세인 동상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동상이 서서히 기울다가 무너졌다.
사람들이 쓰러진 얼굴 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신발을 벗었다. 아랍 문화에서 신발로 사람을 때리는 것은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모욕이다. 그들은 청동으로 된 독재자의 얼굴을 신발 밑창으로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침공 20일 만이었다.

3주 뒤인 5월 1일,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함. 부시가 해군 전투기에서 갑판으로 내려섰다. 비행복 차림에 헬멧을 옆구리에 낀 쉰여섯의 대통령. 그의 뒤로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임무 완수” (Mission Accomplished)
군대를 해산하라
2003년 5월, 미국은 연합군 임시행정처(CPA)²를 세워 이라크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명령은 후세인의 바트당 인사들을 공직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두 번째 명령은 이라크군의 전면 해산이었다.
무기 다루는 법과 전술을 아는 수십만 명이 하루아침에 직업과 계급과 급여를 함께 잃었다. 총 쏘는 법만 아는 실업자가 된 그들 중 상당수가 반군으로 흘러들었다.
경찰도, 군대도, 행정도 작동하지 않는 공백이 벌어졌다. 전쟁의 성격이 그 자리에서 바뀌었다. 정규군끼리의 전쟁이 아닌, 누가 민간인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이라크 정권을 무너뜨릴 계획만 있었을 뿐, 그다음 계획이 없었다.
² CPA(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2003년 5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이라크를 통치한 미국 주도의 임시 행정기구.
“We got him”
2003년 12월 13일 밤, 티크리트 인근 아드와르의 한 농가.
미군 특수부대가 마당의 흙바닥을 걷어냈다. 그 아래 좁고 어두운 구덩이가 드러났다. 산소 파이프 하나와 환풍구가 전부인 굴. 사람 하나가 겨우 눕는 크기였다.
그 안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곁에는 100달러 지폐로 75만 달러가 든 가방과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그는 총을 뽑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사담 후세인이다. 이라크의 대통령이다. 협상하고 싶다.
병사가 답했다. “부시 대통령이 안부 전하랍니다.”
다음 날 오후 바그다드 기자회견장. 최고행정관 폴 브레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가 그를 잡았습니다.” (Ladies and gentlemen, we got him.)
회견장에 있던 이라크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그러나 반군은 이미 후세인 충성파만의 것이 아니었다. 수니파 반군, 외국인 지하디스트, 시아파 민병대가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총을 들고 있었다. 후세인은 2006년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대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죽음도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이에는 이
2004년 3월 31일 아침, 팔루자.
민간 군사기업 블랙워터 소속 미국인 4명이 탄 차량 두 대가 시내 도로에서 매복에 걸렸다. 총격이 쏟아졌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신은 차 밖으로 끌려 나와 불태워졌고, 거리를 따라 끌려 다녔다. 그중 시신 두 구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로지르는 초록색 철교 난간에 전시됐다.
카메라가 그 아래에서 환호하는 군중을 담았다. 이 끔찍한 장면은 곧장 전 세계로 퍼졌다.
미군은 그해 팔루자를 두 차례 쳤다. 집집마다 문을 부수며 들어갔고, 도시는 잿더미가 됐다.
얼마 후, 미군을 향한 비난이 쏟아지는 사건이 보도됐다.
바그다드 인근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였다. 두건을 쓴 남자가 상자 위에 올라서 있었다. 양팔은 벌린 채였고, 손끝에는 전선이 매달려 있었다. 내려오면 감전된다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알몸의 수감자를 군견 앞으로 몰아세운 사진도 있었다. 이빨을 드러낸 개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남자는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목줄을 쥔 병사는 웃고 있었다.
‘이라크 해방’이라는 명분은 그 사진들 앞에서 무너졌다.

이라크는 내전, 미국은 허리케인
2006년 2월 22일 이른 아침, 시아파 성지 사마라. 폭발음과 함께 알아스카리 사원의 황금 돔이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 이라크인들은 서로에게 총구를 돌렸다. 납치와 고문, 차량 폭탄이 일상이 됐다. 바그다드에서는 아침마다 거리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미 육군 자료에 따르면 폭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한 달에 최대 3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과 반군의 전쟁이 아니라, 이라크인끼리의 내전이었다.
같은 시기 미국도 어수선했다. 반년 전인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삼켰다. 수천 명이 며칠 동안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렸지만 연방정부의 대응은 느렸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대량살상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미군 사망자도 계속 늘어났다.
2006년, 부시의 지지율은 30%대로 주저앉았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확성기를 들었던 지 5년 만이었다.
3만 명을 더 보내다
2007년 1월, 부시는 철군 대신 정반대의 카드를 꺼냈다.
미군 3만 명을 추가로 이라크에 보냈다. 지휘는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이 맡았다. 병력은 한때 17만 명까지 불었다. 여론이 완전히 등을 돌린 상황에서 나온, 그의 임기 중 가장 외로운 결정이었다.
방식도 바꿨다. 예전엔 반군 지역을 치고 빠졌다. 이번엔 미군이 주민들 사이에 남았다. 마을에 초소를 세우고 부족 지도자들과 손을 잡았다. 알카에다의 잔혹함에 등을 돌린 수니파 부족들이 마음을 열었다. 그해 후반부터 폭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만 증파는 이라크의 정치적 갈등을 푼 것이 아니었다. 미군이 발을 뺄 수 있을 만큼만 치안을 다독인 조치였다.
“작별의 키스다, 이 개 같은 놈!”
2008년 12월 14일, 바그다드 총리 관저.
임기를 5주 남긴 부시가 이라크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누리 알말리키 총리와 나란히 서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장 앞줄에 앉아 있던 이라크 기자 문타다르 알자이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신발 한 짝을 벗어 대통령을 향해 던졌다.
“이라크 국민이 보내는 작별의 키스다, 이 개 같은 놈!” (This is a farewell kiss from the Iraqi people, you dog!)
부시가 고개를 숙여 피했다. 알자이디가 나머지 한 짝을 마저 던졌다.
“이건 이라크의 과부들과 고아들, 그리고 죽어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This is for the widows, the orphans, and all those killed in Iraq!)
두 번째 신발도 빗나갔다. 경호원들이 그를 바닥에 눌러 끌어냈다.
부시는 몸을 세우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궁금하다면, 신발은 사이즈10이었습니다.” (If you want the facts, it was a size 10 shoe.)
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5년 8개월 전, 피르도스 광장에서 이라크인들은 신발로 독재자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날 그 신발은 미국 대통령을 향했다.

가장 큰 후회
2011년 12월, 오바마 대통령이 대부분의 미군을 철수시켰다. 공식적인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3년 뒤인 2014년 6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이 하루 만에 무너졌다. 점령한 것은 ISIS였다. 미군은 다시 이라크로 돌아가야 했다.
전후 조사위원회는 끝내 대량살상무기를 찾지 못했다.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협력 관계도 입증되지 않았다.
미 국방부 집계상 미군 사망자는 4,419명, 부상자는 31,993명이었다. 이라크인 사망자는 집계 방식에 따라 수십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부시는 훗날 인터뷰에서 가장 큰 후회가 “잘못된 정보를 믿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세인을 제거한 결정 자체는 옳았다는 입장을 끝내 접지 않았다. 체니는 더 나아갔다. 2014년 ISIS가 이라크를 휩쓸었을 때도, 문제는 침공이 아니라 오바마의 철군이라고 했다.
미국은 바그다드를 3주 만에 점령했다. 그 도시를 떠나는 데는 8년이 걸렸다.
Now / What’s Next
명분
23년이 흘렀다.
2026년 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 전역에 기습 공습을 퍼부어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와 다수의 고위 관료를 살해했다. 지도자를 제거하는 데는 하루가 걸렸지만 전쟁은 다섯 달째 답이 없다.
미국이 내건 명분은 핵과 미사일이었다. 이란은 주권과 생존이었다. 명분을 채우지 못한 양측 모두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지 않았다고 말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2500년 전에 쓰인 손자병법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전쟁을 오래 끌어 나라에 이로웠던 경우는 지금껏 없었다.” (夫兵久而國利者 未之有也)
졸렬해도 빨리 끝낸 전쟁은 있었어도, 교묘하게 오래 끌어 잘된 전쟁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글. 이승은 (Eunice Lee) / Frame. No.25 2026년 7월 2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