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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

“이걸로 물어봐

2000년 11월 무렵이었다.
앨라배마에서 열린 한 행사에 취재를 갔다.
어떤 행사인지도, 누가 오는 자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선배들을 따라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영어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고,
현장의 분위기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무엇을 취재해야 할지 몰라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서승건 선배가 다가왔다.

그는
영어 단어 몇 개를 적어 내밀며 말했다.

“이걸로 물어봐.”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한 상원의원 앞에 서게 됐다.

휠체어 위의 시선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을 곧게 마주 본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단단해 보였다.

질문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어떤 대답이든 준비되어 있는 사람처럼.

나는 선배가 적어준 단어들을 떠올리며
한반도 정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묻는
두어 개의 질문을 건넸던 것 같다.

너무 긴장한 탓에
어떤 문장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세 가지는 분명히 남아 있다.

듣는 태도, 답하는 품격

행사장에 가득 찬 소음 속에서도
그는 내 쪽으로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한 단어도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듯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영어가 서툰 걸 알아챈 그는
말의 속도를 늦췄다.

문장을 고르듯
하나씩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대답보다 먼저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인품은
말보다 먼저 내게 왔다.

몸을 기울여 듣는다는 ‘경청’의 태도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드러내는지,
그날 알게 됐다.

질문이 서툴러도
상대가 준비되지 않아도
대답의 품격은 스스로 지켜질 수 있다는 것도.

이후로
듣고 답하는 태도는
삶에서 지켜가고 싶은 기준이 되었다.

식은땀과 하얘진 머릿속

두 번째로 남은 기억은
등에 남은
축축한 감각이었다.

긴장으로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서 있는 동안
식은땀이 천천히 번졌고,
셔츠는 어느새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질문을 던지고 있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점점 하얘져 갔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사실은
질문은 던졌고
그는 성실하게 답했지만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 기자, 잘했어”

세 번째 기억은
늘 나를 따라다닌다.

자리에 돌아왔을 때
서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자알했어!
이 기자, 잘했어!”

그리고
땀에 젖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잘했다는 말로 받기엔
그날의 나는 너무 서툴렀다.
그럼에도 그 말은
마음을 붙들어 주는
힘이 되었다.

그날, 다짐을 했다.

언젠가 노련한 기자가 되어
그 상원의원을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제대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도 놓치지 않겠다고.

나중에 기사를 정리하며 알게 됐다.
내가 만난 그 인물은
베트남전에서
5년 반의 포로 생활을 견뎌낸 전쟁 영웅으로,
‘전쟁광’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과 용기를 지켜내
당파를 넘어 존경받았던
‘공화당의 사자’, 존 맥케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신참내기 기자였던 내가
밤마다 이불을 걷어찼다는 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후배들이 생긴다면
먼저 등을 토닥이며
“잘했어, 잘했어”를
건네는 선배로
살아야겠다고 했다.

하지만 삶은
대개 마음먹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열악했던 신문사 환경을 떠나
전혀 다른 사무직 일을 하게 됐고,

육아의 시간이 이어졌다.

서 선배 역시 비슷한 시기에
윙 가게 비즈니스를 위해
기자 생활을 잠시 내려놓았다.

같은 애틀랜타 한인타운에 살면서도
우리는 오랜 시간
서로를 마주치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건너가고 있었다.

기회는 가고 말은 남고

2018년 8월,
존 맥케인 상원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워싱턴 D.C. 연방 의사당 로툰다에 안치됐고,
그 장면은 TV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거실에서
아이들 빨래를 개며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날의 인터뷰 장면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를 인터뷰할 수 없다는 사실,
시대를 품격으로 비추던
또 하나의 별이 졌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오래 아렸다.

눈물이
툭, 떨어지던 순간
마음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했어…
이 기자, 잘했어.”

그제야 알게 됐다.
사람은 떠나도
말은 남는다는 것을.

시대와 사건은 지나가도
마음속을 환하게 비추었던
말들은 살아
툭툭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날 힘을 준다는 것을.

재회

서승건 선배는 지금
존스크릭 에모리 병원 병동에서
희귀암과 싸우고 있다.

얼마 전 병실을 찾았다.
26년 만에 다시 마주한 얼굴을
선배는 한눈에 알아봤다.
반가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온 듯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내가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해서 미안해.”

나는 말없이
선배의 손을 잡아드렸다.

그는 애틀랜타 한인사회에서
30년 넘게 언론인으로 살아왔다.
그 시간에 갈등이 없었다면
그건 기자로서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툼이 있었고
화해가 있었고
상처와 봉합은 늘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병상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때 등을 돌렸던 사람들까지
병실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린 말들,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옳아진 주장들 사이에서도
그가 사람을 대하던 태도,
그가 건네던 말의 결만큼은
상대의 마음에 닿았을 것이다.

서로를 향해
날선 말들을 품고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짧고 소중하다.

말은 사라진다.
그런데 어떤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병실에서
선배의 얼굴을 보며
그 말과 함께 있던
오래묵은 기억을
다시 만났다.

“잘 견디고 극복할께”

서 선배는 최근
허리뼈에서 암 조직을 채취하는
여섯 번째 수술을 마쳤다.

앞으로도
여러 차례의 수술과
항암 치료가 남아 있다.

통원 치료를 위해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가도
통증이 심해
하루 만에 다시
응급실로 실려오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암은 뼈로 깊게 퍼졌고,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종양이 뼈를 손상시키고
골수로 번졌으며,
붙어버린 뼈 사이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아프게 한다고 했다.

수술로 종양을 걷어내고,
손상된 뼈를 보강하고,
붙은 틈 사이에
다시 공간을 만드는 일들이
앞으로도 남아 있다고 했다.

“온몸이 많이 아플 거래.
환장하것어…
그래도 잘 견디고 극복할게.
홧팅.”

암 진단을 받은 건
불과 두 달 전이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병원에 실려 간 뒤에야
알게 됐다.

평소 크고 작은 통증은 있었지만
버틸 수 있다고 여겨왔던 몸이라
충격은 더 컸다고 했다.

병상에 누워서도
그는 여전히 사람을 챙긴다.
병문안을 온 이들과는
사진 한 장씩을 꼭 남기고,
통증이 잠시 잦아들면
먼저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묻는다.

후배들에게는
좁은 동네에서
몇 안 되는 기자들끼리
서로 보듬으며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 말이
그의 몸보다 먼저
병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 날을 위한 ‘말의 힘’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선배의 기력은
아직 인터뷰를 감당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건강을 되찾은 뒤
이 시간을 돌아보며
다시 마주 앉자고
약속했다.

오늘 선배에게 건네는 이 InnerView는
그날을 위한
아주 가벼운 전주곡이다.

선배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스물여섯 해 동안
내 안에서 자라
내가 나를 다시 일으킬 때마다
되뇌던 한마디를.

“이 기자, 잘했어.”

그 말에 대한
늦은 감사의 인사로
이 글을 남긴다.

“선배님, 힘내세요.”

인생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한마디는
사람을 살린다.

마더 테레사는 말했다.
“친절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는
비록 짧고 쉬울지라도
그 메아리는 영원히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 말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삶을
붙들어 준다.


*서승건 – 코아타임스 대표로 애틀랜타 한인사회에서 30년 이상 언론인으로 활동해 왔으며, 제18기 민주평통 애틀랜타협의회 운영분과 위원장 및 동남부한인회연합회장 특보 등을 지냈다.

Published inInn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