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애들이 밥 먹는 만큼 굶었어요
기자: 미국은 언제, 어떻게 오게 되셨죠?
황병구:
2001년도 3월에 왔어요. 다른 분들은 이민 오신 지 사십 년, 오십 년 되셨다 하지만 나는 좀 늦게 온 편이지요.
저는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경상북도 오지 산골 청송에서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죠. 대학 문 앞에도 못 가봤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많이 지식이 모자라고 상당히 무식한 사람입니다.
제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재산이라고는 조그마한 농토 하나 있었는데 몸 아프시면서 그것마저 치료비로 다 팔아 쓰시고 가셨죠. 사형제 중 셋째인데 우리 어머니가 아들 넷 키운다고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클 때 다른 부잣집 애들이 밥 먹는 것만큼 많이 굶었어요. 진짜 엄청 굶어서… 그 시절 얘기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해서 말을 못합니다.
그래도 청송에서 살면서 젊은 시절 사회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스물두, 세 살 때 동네 새마을지도자도 하고, 마을금고 회계도 보고. 군청도 다니고, 농촌지도소 지도사들 강의도 듣고, 도 단위 모임에도 나가고. 그러면서 선배들을 알게 됐죠.
“니 청송 골짜기에서 백날 해봐도 안 된다”
그때 대구 칠곡에서 부추 농사로 크게 성공한 김희도 씨가 있었어요. 또 포항에는 자기 땅도 없이 바닷가 매립지를 밭으로 만들어 상추 농사로 성공한 최성길 선배가 계셨습니다.
이 두 분이 내보고 맨날 그랬어요.
“야, 니 청송 골짜기에서 백날 해봐도 안 된다.”
희도형은 대구로 오라 했고, 성길이 형은 포항으로 오라 했는데, 나는 선배들한테 신세지기 싫어서 울산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1981년도였어요. 울산이 공업도시로 막 붐이 일 때였습니다.
울산은 공업도시니까 농산물이 모자랄 거다. 근교농업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돈은 없고, 애는 태어나고
돈이 어디 있습니까. 달랑 이십만 원 가지고 갔어요.
그때 연애를 했는데 결혼 전에 덜컥 아들내미가 먼저 나왔습니다. 연탄 화덕 있는 방 하나 얻었지요. 달세가 천팔백 원인가 했습니다. 집사람한테 전화해서 보따리 싸갖고 얼른 울산으로 오라 했죠.
그렇게 둘이 시작했는데, 얼마나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천 번에 한 번 허리 펴기. 새벽 하늘에 별 떠 있을 때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해가 빠져 별이 뜨는 걸 보고 퇴근했습니다.
소를 팔아준 은인
처음에는 깻잎, 상추, 얼갈이배추, 열무 이런 걸 했습니다. 그런데 이십만 원 가지고 농사가 되겠습니까.
농촌지도소 찾아가 땅도 안내받고, 그린하우스 지을 돈이 없으니 동천강 강둑 대나무밭에서 대나무 잘라다가 만들었습니다. 명촌동 이장 허락도 받고요.
그러다 보니 전남 밀양에서 온 사람들이 딸기 농사로 돈을 너무 잘 버는 거예요. 그래서 ‘딸기 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또 돈이 없었죠.
어느 날 밤, 우리 세 식구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막 두드리더라고요. 나가보니 동네 사시는 왕성도 씨가 서 있었습니다. 친하지도 않은 분이었는데 술을 좀 드셨더라고요.
“병구야. 내가 외동인데 평소에 너를 보니 아가 너무 착해서 니 내 동생해라.”
그렇게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일주일쯤 있다가 그분이 자기 집 소 한 마리를 팔아 현금 이백사십만 원을 들고 왔습니다.
“이걸로 한번 해봐라.”
차용증도 없이요. 내가 가진 거라곤 몸뚱아리밖에 없어서 떼어먹으면 그만인데, 그걸 그냥 맡긴 겁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경운기까지 한 대 사줬습니다. 그전까지는 삽 들고 괭이 들고 다 했는데, 경운기 한 대 생기니 일이 달라지더라고요. 형님 농장 일도 해드리고, 내 일도 더 열심히 하고.
그분은 돈만 빌려준 게 아니라, 나를 믿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첫 수익
그 돈으로 육백평 남짓 논을 빌리고 자재를 준비했습니다. 파이프 하나 꽂으면 그 사이에 대나무 다섯 개 꽂아서 그린하우스를 지었지요.
첫해 육백평에서 농사를 지어 육백삼십칠만 원을 벌었습니다. 이백사십만 원 다 갚고 다른 농사빚 다 갚고 나니까 온전히 백만 원이 남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맨손으로 시작해가 돈 백만 원 모으는 게 제일 힘들다. 백만 원만 있으면 그게 종잣돈이다.”
수중에 백만 원이 쥐어진거 보고 나서야 한숨이 푹 쉬어지더라고요.
애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마라
우리 어머니가 평소에 늘 하시던 말씀이 있으셨어요.
“밖에 나가 애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마라.”
하루에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습니다. 밖에 나가서 나쁜 짓 하지 말라는 얘기잖아요.
그 소리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제가 아직도 밖에 나가서 아는 사람이 저기 보이면 쫓아가서 인사를 해야 제 속이 편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한 오십 미터 전방에만 보여도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저를 좋게 봐주시더라고요.
그 무렵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던 황재현 씨가 어느날 경운기 타고 가던 저를 세웠습니다.
“황군, 니 어디 황가이고?”
“평해 황가입니다.”
“나도 평해 황가 아니가. 니 이제 내 동생 해라.”
그 집에 놀러 갔는데 겨울이었어요. 그 집에서 농사지은 배를 하나 깎아 주셨는데, 그 시원한 배맛을 지금도 못 잊습니다. 내가 그전까지 배를 못 먹어봤거든요.
형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좀 도와주고 싶다. 뭘 도와주면 되겠노.”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농사 좀 더 확장해보고 싶은데, 오백만 원쯤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두말 없이 내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1700평 농장을 지었고, 물건을 1500만 원어치 팔았습니다.
또 다 갚고 나니까 오백만 원이 남았지요. 그때부터는 남한테 농비 안 빌리고 그 돈으로 농사를 키워갔습니다.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겠다
기자: 울산에서 농민 후계자에도 선정되셨다고요?
황병구:
예. 농사가 잘 된다고 소문이 나니까 시정부에서 농민 후계자를 하라고 찾아왔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였지요. 그런데 내가 울산 본토 사람이 아니고 객지에서 왔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자꾸 떨어뜨릴라 하는 겁니다.
그때 시청 담당자였던 허령 씨라는 분이 있었어요. 이분이 윗선에다가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면서까지 저를 밀어줬습니다. 그래서 결국 울산시장, 경찰서장, 새마을지도자, 농촌지도회장 등 수십 명 앞에서 사업계획서를 발표하는 자리까지 가게 됐습니다.
나는 이미 지원금 신청할 때 머릿속에 그림이 다 그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내 생각을 그대로 발표했습니다. 결국 15명 중 3명이 뽑혔는데, 2명은 울산 토박이였고, 그리고 한 명이 저였습니다.
그렇게 울산 덕을 많이 봤습니다.
에라, 미국 가야 되겠다
그 뒤로 1989년에 울산 조경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채소·과채로 하던 업을 관엽식물로 바꿨지요. 관엽을 한 2년 하다가 양란, 그러니까 서양란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기자: 한국에서부터 양란을 시작하신 겁니까?
황병구:
예. 한국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하다가 한국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난 시장이 자꾸 죽는 거예요. 내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농업 소득이 상당히 좋았는데, 점점 소득 보장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수출을 해야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일본에도 조금 팔아보고, 중국에도 팔아봤는데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농림부에 세계 난 시장 자료를 요청했어요. “세계에서 난 시장이 제일 좋은 곳이 어디냐” 하고요.
그랬더니 중앙대학교 교수하다가 장관하신 김성원 장관이 미국 난시장 자료를 책으로 만들어 놓은 걸 농림부에서 찾아서 보내주셨습니다. 내가 그걸 한 다섯 번 읽었어요.
읽고 나서 결심했습니다.
“에라, 미국 가야 되겠다.”
올랜도로 이어진 한 통의 연락
근데 미국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국에 아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습니다.
“미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우리 동포가 있으면 누구라도 소개 좀 해다오.”
그랬더니 부산에 있는 조태현 씨라는 분이 연락을 해왔어요. 자기 아는 사람이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농사짓는다고.
그 사람이 오영길 씨였습니다. 당시 올랜도에 한 오십 개 농가가 있었는데, 오영길 씨가 올랜도 그린하우스 한인협회장이었습니다.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울산에서 난 농사짓고 있는데, 혼자가 아니라 회원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국 난 시장이 너무 어렵습니다. 미국에 수출 전진기지를 짓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도와주는 게 아니라 동업하자”고 하면서 미국에 들어오라는 겁니다.
알고 보니 오영길 씨가 1천 평 농장을 사서 뼈대를 세워둔 상태였어요. 그분도 우리를 잡고 싶었던 거지요.
한국 사람한테 사기당하면 안 된다
막상 미국 들어가려 하니까 주변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미국 가면 한국 놈한테 사기당한다. 한국 사람 조심해라.”
근데 나는 영어를 하나도 못하니 한국 사람 아니면 거래 자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오영길 씨를 일단 한국으로 들어오게 했지요.
미국에 수출하려면 정부 지원도 받아야 하고, 확실히 검증도 해야 되니까 농협중앙회 울산시지부장, 울산시 농정과장, 농촌지도소 소장, 내가 속한 협동조합장까지 다 모아서 집단 면접을 했습니다.
이후에 다 물어봤지요.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결론은 “해볼 만하다”였습니다. 그래서 업무협약을 맺었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해보시오
그래도 내가 혹시 판단을 잘못하면 안 되니까, 조합장을 찾아가 조합에서 투자를 좀 하라 했습니다.
조합장이 묻습니다.
“우리가 왜 투자를 해야 합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농협 역할이 뭡니까? 우리가 농사 지어서 미국 가서 팔아오려고 합니다. 미국을 하나도 모르는 내가 들어가서 다 떼이고 알몸으로 돌아오면 면이 안 서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조합장이 말합니다.
“이제껏 이렇게 지원 받아서 미국에 수출한 선례가 없습니다. 협동조합 1300여 개 중에 미국에 간 농사꾼이 한 명도 없어요. 이사회 승인 받으려면 골치 아픕니다.”
그래서 내가 밀어붙였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한번 해보시오.”
결국 박기수 조합장이 이사회에 안건을 올렸습니다.
‘전국 1300여 조합 중 최초로 미국 수출 전진기지 직접 투자’
그랬더니 이사들이 뭔지도 잘 모른 채 4억5천 정도를 투자해줬습니다. 우리 다섯 농가가 각자 1억씩 내서 5억을 보탰습니다.
장관에게 쓴 편지
그리고 내가 농림부 장관에게 편지를 한 장 썼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한국 농업 현실이 어렵다. 농민들이 살려면 결국 수출을 해야 한다. 그런데 농촌에서 외국 바이어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우리가 미국 플로리다에 농장을 짓고 수출 전진기지를 세우려고 한다. 한국에서 난을 가져가 거기서 키워 미국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농민들이 돈이 없다. 지원을 선처해 달라.
사실 장관에게 편지를 쓴다고 그게 장관 손에 갈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일주일 뒤 농림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이 장관에게 편지 쓰셨죠?”
“예, 제가 썼습니다.”
“장관님이 도와주시라 했습니다. 울산시에 사업계획서 올리라고 공문 보냈습니다.”
전화를 끊고 바로 시청 직원들 불러서 밤새 서류 작성했습니다.
결국 농림부에서 3억7천만 원 정도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조합 자금, 우리 농가 자금, 농림부 지원금을 합쳐 총 14억가량을 가지고 조합장, 지도 상무 등 6명과 함께 플로리다로 왔습니다.
그리고 손수 농장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10에이커지만, 그때는 5에이커였어요.
그때부터 진짜 미국 농사가 시작된 겁니다.
같이 가면 둘 다 죽는다
기자: 처음 미국에 오셔서 바로 순탄했습니까?
황병구:
아니지요. 다 짓고 보니까 동업이 생각처럼 안 맞았습니다.
우리는 농사를 짓고, 오영길 씨는 판매를 맡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첫해 농사지은 물건을 못 파는 겁니다. 나는 한국에서 이미 유통 경험도 있고 계산이 서 있었는데, 이게 돌아가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당신 비즈니스맨이 아니다. 당신하고 우리하고 같이 하면 둘 다 죽는다.”
그러면서 제안을 했어요.
“내가 우리 지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 당신이 우리 것을 인수해라.”
그랬더니 돈이 없어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또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 것을 팔아라.”
그랬더니 또 안 판다고 합니다.
결국 6개월 넘게 실랑이를 했습니다. 그 사이에 농장은 돌아가야 하고, 사람은 써야 하고, 비용은 나가고. 쉽지 않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내가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시세보다 십만 불을 더 얹어 주고 인수했습니다.
헤어질 때도 사람은 남겨야지
기자: 동업자와 갈라서는 게 동포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황병구:
그래서 내가 먼저 정리를 했습니다.
여기가 작은 동네입니다. 저는 미국 온 지 얼마 안 됐고, 다른 농민 분들하고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 괜히 말 한 번 잘못 나오면 평생 갑니다.
그래서 내가 오영길 씨를 불러 저녁을 먹으면서 말했습니다.
“회장님, 우리가 이제 헤어져야 하는데 동포사회에서 자칫 우스운 소리 나오면 안 됩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 번만 해주이소.”
그랬더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동네 농사짓는 사람들 전부 불러서 저녁을 한 번 살 테니, 그 자리에서 이렇게만 말씀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같이 하려다 제 개인 사정으로 못하게 됐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황병구 좀 밀어주이소.”
딴 얘기 하지 마시고 그 말 한마디만 해주십사 부탁했지요.
다행히 오영길 씨가 그대로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말 없이, 탈 없이 잘 마무리됐습니다.
사업은 깨질 수 있어도 사람은 깨지면 안 되지요.
이게 미국이구나
기자: 판로는 어떻게 뚫으셨습니까? 제일 시급한 문제였을 텐데요.
황병구:
판로가 없으니 쇼를 나갔습니다.
플로리다에서 제일 큰 쇼가 올랜도 컨벤션에서 하는 TPI Show입니다. 마이애미에서도 크게 하고요. 그런 크고 작은 쇼에 부스를 사서 10년을 나갔습니다. 난을 트럭에 싣고, 밴에 싣고, 계속 나갔지요.
집 짓는 자재 홍보하는 홈쇼에도 나갔습니다. 거기는 보통 타일, 싱크대, 마루 이런 거 파는 데인데, 난을 갖고 오는 벤더는 우리밖에 없으니까 사람들이 신기해서 모이더라고요.
한번은 텍사스에서 열린 홈쇼에 딸하고 둘이 갔습니다. 딸도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영어를 하나도 못하고, 나도 하나도 못합니다. 둘이서 밴에다가 난을 잔뜩 싣고 갔지요.
차를 저 멀리 세워놓고, 쪼매난 손바닥만 한 화분 몇 개 들고 와서 진열하고, 또 가서 들고 오고, 또 가서 들고 오고… 그렇게 두어 번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집어 들고, 두 사람이 집어 들고, 계산하겠다고 서는데…
야~
줄이 쫙 서는 겁니다. 몇십 미터가 쭉 이어져버렸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눈이 휘둥그레 했습니다.
‘아니, 이게 뭐고?’
한국 같으면 그냥 집어가버릴 낀데, 미국 사람들은 난을 하나씩 들고 줄을 딱 서서 기다리는 거예요.
‘하아… 이게 미국이구나.’
그 순간, 머리가 번쩍 했습니다.
‘미국에서 장사하면 돈 벌겠구나.’
영어 못하는데 자꾸 말 시켜
그런데 문제는 영어였어요.
나랑 딸은 “15달러” 이 말밖에 못하는데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시키는지 죽겠더라고요.
“저번에 산 난이 죽었는데 어떻게 살릴 수 있냐”
“물을 얼마나 줘야 되냐”
우리는 못 알아듣고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손님들이 저거들끼리 막 조언해 주면서 해결을 하더라고요.
“너 물을 너무 많이 줬을 거다.”
“아니다, 햇빛이 부족했을 거다.”
“이건 이렇게 해야 된다.”
그렇게 떠들면서도 계산은 다 하고 갑디다.
그날 하루, 딸하고 둘이서 오천 불어치를 팔았습니다.
영어는 못해도, 장사는 아주 잘했습니다.
입소문이 물고 온 손님들
쇼에 계속 나가다 보니 손님이 손님을 물고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나는 쇼에 나가면 그냥 파는 걸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여자분이 혼자 오셨다든가, 연세 드신 분들이 사러 오셨다든가, 타주에서 몇 시간씩 차를 몰고 오신 분들은 내가 일일이 차까지 따라가서 다 실어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꽃이 핀 난은 잘못 실으면 차로 이동하는 사이에 꽃잎이 부딪혀 상처가 납니다. 그러면 집에 가는 동안 다 망가지거든요.
그분들은 잘 못 싣는데 내가 실으면 기술적으로 쫙 실어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했죠. 근데 그게 또 입소문이 쫙 나버린 겁니다.
“코러스 오키드 주인이 참 성실하다.”
한번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온 손님이 난을 잔뜩 샀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한다고 하더라고요.
밤에 차에 실어두면 플로리다도 겨울 새벽에는 추워서 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밤에 난을 덮어두고, 보온해두었다가 새벽에 아들하고 직원까지 셋이 나와서 그분 차에 다 실어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엄청 감동을 받아서 가신 거지요.
그 뒤로 생판 모르는 노스캐롤라이나 장사꾼들이 우리 농장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법입니다
기자: 그렇게 신뢰를 쌓으면서 큰 거래처도 생기셨겠네요.
황병구:
우리는요, 말이 법입니다. 한번 약속하면 세상 없어도 물건 만들어 냅니다.
플로리다에서 제일 큰 코스타 농장 같은 데하고도 20년 넘게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코스타 같은 큰 농장은 우리 것만 받는 게 아니고, 여기저기서 다 받아다가 나란히 놓고 테스트를 합니다.
근데 꽃 수명 테스트를 해보면 우리 난이 제일 오래갑니다.
왜 그러냐 하면, 비배 관리가 다릅니다.
키울 때는 질소를 높여 빨리 크게 만들고, 출하 직전에는 인산가리를 높여 꽃을 더 실하게 하고 수명을 길게 가져가도록 합니다. 또 악조건에서도 잘 버티게 하고요.
그래서 딱 갖다 놔보면 우리 난만큼 오래가는 게 없습니다.
한번은 코스타 농장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플로리다에서는 네가 베스트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인마, 플로리다에서 미국 전역에 난을 얼마나 공급하는지 아나? 4~50프로를 여기서 공급한다. 그러면 미국에서 내가 제일 잘 키우는 놈이지.”
그랬더니 막 웃더라고요.
이거 당신들이 잠자고 있는 겁니다
기자: 농장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황병구:
한국 난을 화분째 미국에 들어오게 만든 겁니다.
처음 우리가 미국 들어올 때는요, 재배하는 난을 화분째로 들여오는 제도가 안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난을 전부 뿌리째 뽑아서 다 씻어가지고 세척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 와서 다시 심으면 한 30퍼센트가 죽어버립니다.
한국에서는 좋은 걸 보냈다 하고, 우리는 여기서 죽었다 하고. 크레딧 달라 하면 또 안 주려고 하고. 결국 회사가 다 끌어안아야 했습니다. 이게 버텨지지를 않더라고요.
그때 농림부 고참 국장을 지내던 김경규 씨가 농무관으로 미국 대사관에 와 있었습니다. 예전에 국장 시절에 저하고 인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올랜도까지 직접 찾아왔습니다.
“형님,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농장 확장하시려면 시설비 지원받게 해드릴까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거는 필요 없고요. 대만이나 중국, 코스타리카는 화분째로 미국에 들어오는데 우리 한국만 안 됩니다. 이거 당신들이 잠자고 있는 겁니다. 이거 해결해 주이소.”
그때부터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만들어 내이소“
미농무부(USDA)하고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디다.
협상 시작하고 한 3년쯤 지나서 김경규 농무관이 귀임하고, 박병홍 농무관이 인수인계를 받아 왔습니다. 또 올랜도에 인사하러 와서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또 말했습니다.
“만들어 내이소.”
박 농무관이 알아보니 미국에서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품목은 수출 물량 순서로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난은 수출량이 적어서 리스트 맨 끝에 있다는 겁니다.
1순위에 들어야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데,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이 1순위로 땡겨 넣어라. 무조건 땡겨 넣어라. 당신이 이거 해결하면 한국 농민들이 미국에 화분째 수출하게 돼서 대대손손 당신 이름 기억할끼다. 만들어 내라.”
그랬더니 “알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양반이 진짜 1순위로 끌어올려 버렸습니다.
양국이 합의를 보고 사인까지 다 끝났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았지 뭡니까.
이건 세상 누구도 못합니다
합의는 됐는데, 미국 의회에서 선포를 해야 효력이 생기는데 의원들이 그걸 안 하고 있는 겁니다.
박 농무관이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연방 상원의원 아는 사람 있으세요?”
나는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상원의원을 어찌 압니까.
그런데 내가 거래하던 동네 은행에 백인 여자 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당발입니다. 평소에도 나를 좋게 봐줘서 도와줬던 분입니다.
그분 도움으로 결국 연방 의회에서 선포까지 이뤄졌습니다.
그게 2019년 9월입니다.
한국 난이 처음으로 화분째 미국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십 년 걸렸습니다.
김경규 농무관, 박병홍 농무관, 나중에 권재한 농무관까지 이어져서 마무리했습니다.
이건요, 세상 누구도 쉽게 못합니다.
근데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이제 한국 농민들이 난을 키워서 미국에 안정적으로 보낼 길이 열린 겁니다.
그게 제일 보람 있었습니다.
“농대를 보낼까요?”
기자: 농장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세요?
황병구:
지금은 우리 아들이 전반적인 관리를 다 도맡아 합니다.
아들은 저와 달리 욕심이 없습니다. 일하는 스타일이 저랑 완전 반대입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아들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 건강도 상하고 힘들어 하는 바람에, 내가 하지 말고 쉬라고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와서는 그러더라고요.
“제가 열심히 한번 해볼게요.”
이제는 저보다 훨씬 잘합니다.
아들이 농대 생물배양학과를 나왔거든요. 난 조직 배양하는 거 전문가입니다. 저는 미수금이 50만 불, 60만 불 계속 밀려갔었는데, 아들은 어떻게 하는지 미수금도 없고 아주 기가 막히게 운영을 합니다.
제 며늘아기가 한 번은 손주 나중에 의사 시켜야 하나 이런 말을 하다가, 농장이 잘 굴러가니까 또 그러더라고요.
“농대를 보낼까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일본 사람들 한번 봐봐라. 장인 정신이 얼마나 투철하냐. 일본에서 우동 하는 사람도 할아버지 때부터 했던 그 우동은 맛이 다르다. 내가 하던 거 너희 신랑이 하고, 너희 신랑이 하던 거 너희 아들이 하면 퀄리티가 훨씬 좋아질 거야. 그게 바로 옳은 농사꾼이 하는 거다. 그걸 시켜라.”
김영란법 이후
기자: 다음 목표도 있으세요?
황병구:
한국의 김영란법 이후로 고급 식물 농사짓던 사람들이 정말 힘들어졌어요. 난 농장도 많이 없어졌죠.
나중에 농산물은 10만 원까지는 선물하도록 해놓긴 했지만,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 농업이 점점 설 자리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했습니다.
미국에다가 식물을 다루는 한국 체인을 만들어야 되겠다.
한국은 경매 제도입니다. 난 하나 키우는데 3천 원 들어가는데, 경매가가 2천5백 원 나오면 5백 원 손해입니다. 그러면 농민이 죽죠. 부채는 자꾸 늘어나고.
그래서 내가 이거를 해결해 줘야 되겠다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해보니까, 농민들이 난 하나를 키워도 최소한 천 원은 남게 해줄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구조를 만들어 놓으면, 한국에 새만금 같은 땅에 농림부가 난 재배 수출 단지를 크게 짓고, 전국 농민들이 첫해에 천만 개, 나중에는 4천만 개, 5천만 개까지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 농림과학원, 경상북도 쪽이랑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명
이게 미국에서는 가든 사업입니다. 가든센터를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근데 이 일은 개인이 하면 안 됩니다. 개인은 결국 돈을 벌려고 하지요.
그러면 값싼 중국 난, 대만 난을 갖고 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난은 영구적으로 못 들어옵니다.
그래서 나는 국가가 투자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내가 계산을 해봤습니다. 100개만 만들면 됩니다. 100개만 돌아가면 그다음부터는 큰 돈이 안 들어갑니다. 센터가 스스로 벌어서 1년에 10개씩은 늘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이애미에서 보스턴까지, 동남부 쪽으로 100개에서 150개 정도.
그리고 나중에, 내가 죽고 난 뒤에라도 500개까지 가면 한국에서 난 농사짓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영구적으로 수출할 길이 열립니다.
그 구조만 만들어 놓으면 농민들이 난 하나 키워도 제값 받고, 최소한 손해는 안 보고, 남는 장사 하면서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을낍니다.
일본처럼 장인 정신을 길러서, 최고 좋은 식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길은 내가 만들어 놓고 가야지요.
그뿐입니다.
황병구 – 코러스 오키드 대표
미주한인상공회의소총연합회 제28대, 제30대 회장
2023년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조직위원장
2025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