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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내지 않는 사람이 기회를 잡는다

미국 공항을 움직이는 한국인

휴스턴 공항 터미널을 걸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분주했다. 나이는 이미 일흔 중반을 넘겼지만, 말끝마다 새로운 일을 이야기했다.

“나는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끔 나 자신도 왜 이렇게 계속 새로운 걸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미국 이야기는 1974년, 비극적인 한국 역사의 한 장면과 함께 시작됐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총에 피격된 육영수 여사

미국에 내린 날, 들려온 비보

기자: 미국은 언제 오셨지요?

유재송: 제가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날이 1974년 8월 15일이었습니다. 광복절이었죠. 캔자스주 애빌렌이라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딱 들어갔는데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소식이 들리더라고요. 막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그날 공기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낯선 도시였고, 한국 사람도 없었고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손톱만 한 공고 하나가 바꾼 인생

그가 미국 땅을 밟기까지는 작은 우연이 있었다. 전북 정읍 감곡면의 시골 청년이 신문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단 한 줄의 공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기자: 미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된 건가요?

유재송: 저는 전북 정읍 감곡면 출신입니다. 벼농사하고 고추 재배로 유명한 시골 동네죠. 거기서 태어나서 전주로 유학해 전주북중, 전주고를 나왔어요. 명지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군대 3년을 마치고 나니까 25살이었습니다.

그때 신문을 보다가 손톱만 한 크기의 공고 하나를 봤어요. ‘정부 지원 미국 농업연수생 모집’이라는 거였습니다. 딱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죠. 이 기회를 놓치면 미국에 영영 못 가겠다 싶었어요.

사실 저는 농촌에서 자랐으면서도 농사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낙방할 위기에 처했는데, 고향 선배 중에 신문사 기자로 일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 선배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주리대학교 연수 프로그램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50년 전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죠. 그 선배가 나중에 국회의장을 지내신 김원기 선배님이에요. 26년 후에 그렇게 되실 줄은 그때 꿈에도 몰랐죠.


아이스크림 한 컵이 불러온 믿음

낯선 땅에서 영어를 익혀 가던 청년에게 뜻밖의 만남이 찾아왔다. 그 만남은 그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기자: 애빌렌에서 지내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셨나요?

유재송: 연수를 받으면서 영어를 배우고 있는데 어느 날 식품점에서 저를 본 백인 부부가 말을 거는 겁니다. “우리 집에 한국에서 온 딸들이 있는데 아이스크림 먹으러 오지 않겠느냐”고요.

‘한국에서 온 딸들’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찌나 사람이 그립던지, 의심할 겨를도 없이 따라갔어요.

근데 가서 보고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10대 딸아들이 있는 부부가 어린 한국 소녀 두 명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 거예요.

저는 가족은 핏줄이라는 한국식 생각밖에 없었는데, 머나먼 나라에서 모르는 아이를 둘씩이나 입양한다는 게 그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러면서도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더라고요.

그 부부의 권유로 감리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음식도 좋고 부부네 집 친교가 좋아서 나간 거였는데, 마음 한켠에 부부가 했던 말이 남더라고요. 부부는 “하나님이 전쟁을 겪은 나라의 아이를 입양하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거든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이 하나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이길래 전쟁 나라 아이를 입양하라는 마음을 주셨을까?’

그러다가 매주 예배마다 부르던 ‘His Name is Wonderful’이라는 찬송이 어느 날 갑자기 제 마음을 확 움켜잡았습니다. 제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된 순간이죠.

지금도 그 얘기하면 눈물이 나려 해요. 그래서 1975년 3월에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가져갈 테면 가져가 봐라”

연수를 마친 그는 텍사스 샌안토니오로 이주했다. 지역 한인교회 교인들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버지가 공부하라고 주신 돈으로 허락도 안 받고 덜컥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후 휴스턴으로 자리를 옮겨 새 출발을 했지만, 시작은 누구보다 작고 낮은 곳에서였다.

기자: 휴스턴에서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유재송: 시급 3.25달러짜리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그로서리에서 물건 진열하는 스탁 일을 시작했습니다. 파트타임으로 청소일도 배우기 시작했고요.

근데 저는 현실에 그냥 안주하는 성격이 못 됩니다. 일하던 세븐일레븐 지역 매니저를 직접 찾아가서 “점원 임금으로는 못 살겠으니 슈퍼바이저로 써 달라”고 요구했어요.

처음엔 한 번에 딱 잘라 거절하더라고요. 근데 2주 뒤에 연락이 왔습니다.

알고 보니 직전 슈퍼바이저가 강도한테 납치당해서 사표를 써버린 우범지역 자리였어요. 매일 매장 열 곳을 돌면서 매상을 수금해 은행에 입금하는 일이니까 항상 범죄의 표적이 됐죠.

근데 저는 태권도와 유도도 했거든요. 가게 앞에 수상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도 오히려 돈이 든 가방을 휘두르면서 “가져갈 테면 가져가 봐라” 하고 여유를 부렸습니다.

그 배짱이 저를 결국 사업가로 만든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월 55만 달러짜리 수표

휴스턴 JDDA그룹 사무실 벽에는 커다란 수표 모형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1995년 1월 30일, 웨스팅하우스사가 발행한 55만 4534달러 06센트짜리 수표다. 유 회장은 그 액자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유재송 회장이 웨스팅하우스사가 발행한 수표 모형 액자를 들고 있다.
(Photo: Eunice Lee)

유재송: 조지아주 사바나강 연안에 있는 웨스팅하우스 원자력 발전소 첫 달 청소비로 받은 겁니다. 그게 10년간 이어졌어요. 그 계약 하나만으로 6000만 달러 이상을 벌었죠.

1980년에 제가 회사를 세웠을 때는 월 1만 달러 계약도 채우지 못하던 회사였어요. 그런데 15년 만에 그렇게 됐으니 업계에서 꽤 화제가 됐습니다.

꼼꼼하게 관리하고 원가를 줄이면서 쉘, 엑손, 텍사코, 셰브론 같은 정유 대기업 계약을 연이어 따냈고 듀퐁, 다우 케미컬, 월마트, 엔론 고층 빌딩도 맡게 됐습니다.

원자력발전소에 뉴멕시코 핵폐기물 처리장 청소까지 맡게 되니까 업계에서는 저희를 보증수표처럼 보기 시작했어요. 직원이 1800명이었고 텍사스, 아칸소, 미시시피, 뉴멕시코, 사우스캐롤라이나, 루이지애나까지 6개 주에 걸쳐 일했습니다.


잘 될 때 떠나는 사람의 끈기

미주 최대 한인 청소업체 가운데 하나로 성장한 HBS. 그러나 유 회장은 2016년 2월, 그 회사를 경쟁업체에 팔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였다.

기자: 잘 되던 회사를 왜 파셨어요?

유재송: 공항 식당 사업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미래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회사 팔고 나서는 비영리 재단인 JDDA 파운데이션을 세웠어요. 첫 사업으로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 초청 공연을 추진했습니다.

근데 매니저한테 연락을 하니까 향후 1년 스케줄이 꽉 찼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면 거기서 포기하죠.

근데 저는 6개월 내내 전화를 했어요. 취소된 공연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요. 그렇게 해서 결국 2016년 11월에 텍사스와 조지아에서 공연을 성사시켰습니다.


바닥 닦던 곳에서 매장을 열다

기자: 공항 식당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유재송: 20년 전에 제가 휴스턴 조지 부시 국제공항 터미널 C 식당 청소용역을 맡아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항 식당 매니지먼트 회사 오너가 저한테 면담을 요청하는 겁니다. “2년밖에 안 남은 우리 계약 연장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요.

제가 주류 대기업 청소 수주를 위해 선거 때마다 시장, 시의원들의 선거운동을 도와왔거든요. 그러다 보니 담당 시의원과 자리를 만들었는데, 시의원이 그 오너한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제이슨이 부탁했기 때문에 연장해 주는 겁니다.”

유재송 회장과 작고한 실베스터 터너 전 휴스턴 시장
(Photo: Eunice Lee)

근데 그 오너가 고맙다고 하더니 갑자기 “내 회사를 인수하라”는 겁니다. 매각가가 200만 달러인데 10만 달러만 가져오면 오너 파이낸스를 해 주겠다고요. 시장 바뀔 때마다 계약 연장하는 게 신물이 났던 거죠.

저는 공항 비즈니스의 미래가 보였습니다. 바로 인수했어요. 10년간 계약 연장하면서 공항 식당 매니지먼트를 했죠.

매니지먼트 계약이 끝나갈 때쯤엔 직접 매장을 운영하는 게 훨씬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새 매장이 나올 때마다 입찰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늘리다 보니 휴스턴 조지 부시 국제공항에 9곳, 댈러스-포트워스 공항에 2곳, LA 국제공항에 5곳, 총 16개 매장이 됐습니다.

칙필레 2곳, 팬더 익스프레스 4곳 같은 알짜 브랜드 위주로요. 그리고 제가 옛날에 점원으로 일하던 세븐일레븐도 댈러스-포트워스 공항에 입점시켰습니다.

유재송 회장이 휴스턴 조지 부시 국제공항 칙필레 매장 앞에 서 있다.
(Photo: Eunice Lee)

기자: 공항 비즈니스가 한인에게 쉬운 시장은 아니잖아요.

유재송: 속뚜껑을 열어보면 여전히 백인 위주의 끼리끼리 네트워크입니다. 다른 인종이 끼어드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한인은 더욱 쉽지 않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기 때문에 매장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휴스턴 경찰국 건물과 휴스턴 박물관. 그 벽에 유재송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걸 아는 한인은 많지 않다. 스스로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물론, 재해가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현금과 물품을 보낸다. 2021년엔 TV 뉴스에서 우연히 강도의 총에 맞아 순직한 경찰관 소식을 보고 유가족에게 전달해 달라며 거액의 수표를 휴스턴 경찰국장에게 보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난민, 튀르키예 지진 피해자 성금도 한인 사회에서 가장 많이 냈다. 하지만 어느 보도에도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유재송: 재물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이름이 부각되면 안 됩니다.

텍사스에 이민 와서 건강하게 열심히 일하고, 자녀들 키우고,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캔자스 애빌렌 감리교회를 찾은 유재송 회장과 유옥주 여사

한인 최초로 미국장로교회 남텍사스 노회장을 지낸 그는 3년 전 부인 유옥주 여사와 함께 48년 만에 캔자스 애빌렌 감리교회를 찾았다. 처음 세례를 받았던 그 교회였다. 유창한 영어로 성도들 앞에 선 그의 간증이 끝나자 따뜻한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날 누구보다 감동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강의실에 담긴 50년

지난해 5월, 명지대학교는 유재송 회장에게 명예 행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5년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지 꼭 50년 만이었다.

그리고 올해 2월, 명지대 인문캠퍼스에는 ‘유재송 기념 강의실’ 현판이 걸렸다. 

그가 모교에 기부한 발전기금은 지금까지 약 3억 원. 장학금으로, 강의실로, 후배들의 배움터로 남았다.

유재송: 별로 자랑할 것 없는 인생입니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해 온 것, 그게 자랑이라면 자랑이죠.

유재송 회장 명지대 명예 행정학박사 학위 수여식
(Photo:명지대 웹사이트)
명지대학교(총장 임연수) 관계자들이 지난 2월 ‘유재송 동문 기념 강의실 봉헌예배 및 현판식’을 진행했다.(Photo:명지대 웹사이트)

에필로그

휴스턴 공항 터미널을 다시 걸어 나가는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시골 농가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신문 귀퉁이의 작은 공고 하나를 보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반세기 뒤 그는 미국 주요 공항에서 수천만 달러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는 기업가가 됐다. 그러나 유재송 회장은 여전히 그 모든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한다. 그의 말처럼, 그것은 특별한 성공담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시간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여든을 몇 해 남기지 않은 유 회장의 인터뷰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유재송: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도전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By Eunice Lee

유재송 회장 (Photo:Eunice Lee)

유재송 (Jason Yoo) 회장 JDDA 그룹 

전북 정읍군 감곡면 출생. 전주북중·전주고 졸업. 명지대학교 행정학과 졸업(1975). 1974년 도미.

사회활동 휴스턴 제21대 한인회장·휴스턴 아시아 상공회 종신 이사 회장·휴스턴 올림픽 준비위원·휴스턴 국제협력 자문위원·시카고 세계한인선교 선교회 부회장·텍사스 서남부 장로교회 노회장 역임.

수상 1992년 미국 상무부 우수 기업가상(Outstanding Entrepreneur Award, Houston Minority Business Development Center). 1995년 재미아시아상공회의소 올해의 기업가상(Asian Chamber of the Entrepreneur of the Year). 2000년 리 브라운 휴스턴 시장·빌 클린턴 대통령 명의 산업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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