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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권은 어떻게 인질이 되었나

“본국으로 돌아가서 받아라”

2026년 5월 22일 금요일 오후 1시 28분, 워싱턴 D.C. 이민서비스국(USCIS) 대변인 잭 칼러가 한 줄 성명을 냈다. 

“이제부터 미국에 일시적으로 체류 중이면서 영주권을 원하는 외국인은 본국으로 돌아가 신청해야 한다.” 

단 한 문장. 그러나 그 문장이 발표된 순간 미국 전역의 이민 변호사 사무실 전화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반세기 동안 미국 안에서 영주권 신청 절차 전체를 마칠 수 있었던 관행이 하루아침에 뒤집힌 것이다. 

Photo: NBC NEWS Screenshot

미국 시민과 결혼한 배우자도, 취업·학생 비자 소지자도, 난민과 망명자도 마찬가지였다. 인도 출신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수년의 적체를 견뎌야 하고, 러시아 출신은 본국에 미 대사관 자체가 없다.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과 본국에서 받아줄 곳이 없다는 현실이 한 문장 안에서 충돌했다. 

그러나 영주권을 정치의 인질로 쥐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45년 전 이미 한 번 펼쳐졌던 장면이다.


영주권 박탈, 그 첫 번째 인종

1882년 5월, 백악관 집무실. 체스터 아서 대통령의 책상 위에 법안이 놓였다. 의회가 막 통과시킨 따끈한 종이였다.

법안의 표적은 명확했다. 캘리포니아 금광에서, 대륙횡단철도 건설 현장에서, 샌프란시스코 빨래방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 당시 중국인은 미국 전체 인구의 0.002%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부 백인 노동자들은 임금 하락의 모든 책임을 중국인들에게 떠넘겼다. 의회는 그 분노를 받아 적었고 아서는 펜을 들어 서명했다.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 이 법이 한 일은 단순한 입국 금지가 아니었다. 이미 미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과 그들의 미국 출생 자녀까지 시민이 될 권리를 박탈했다. 그들은 미국 땅 위에서 일하고, 세금을 내고, 자녀를 낳고, 늙어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주(永住)할 수는 없었다. 한 인종 전체에게 “너는 영원히 손님이다”라고 선언한 법이었다. 

1882년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이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에 서명했다.

미국 영주권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미국은 애초에 영주권을 인종으로 나눠 줬다.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끝내 주지 않았다. 그 첫 줄에 중국인의 이름이 적힌 것이다. 


벽에 새긴 칼자국 60년

1910년, 샌프란시스코만의 섬. 중국인 배제법이 만들어낸 풍경 중 하나가 샌프란시스코만의 작은 섬에 있었다. 엔젤 아일랜드. 태평양을 건너온 중국인이 미국 본토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미국에 친척이 있다고 주장하는 중국인들이 줄을 섰다. 그 친척이 미국 시민이면 입국 자격이 부여됐다. 그래서 이민국 심사관들은 친척 관계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가려내야 했다. 답이 친척의 증언과 한 자라도 다르면 다시 심사. 다시 대기.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가장 길었던 사람의 기록은 756일이었다. 그동안 한 방에 200명이 잠을 잤고 가족은 남녀로 분리됐다. 

기다리다 미쳐가던 사람들이 작은 칼로 나무벽에 글을 새겼다.

 “천 가지 시름과 만 가지 한이 미간에서 타오른다. 미국 대륙에 발을 디디기를 바라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영주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가 그 막사 안에서 결정됐다. 통과한 사람은 본토로 갔고,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배에 실려 돌아갔다. 영주권의 무게가 그 벽에 칼로 새겨졌다. 

Angel Island: 중국계 이민자들의 시와 이민, 그리고 배척의 역사
(Photo: NBC News screenshot)

한인 족보의 첫 줄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 항구. RMS 게일릭(Gaelic) 호가 부두에 닻을 내렸다. 갑판 위로 102명이 내려왔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25명. 인천에서 출발한 첫 한국인 이민자들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사탕수수 농장주의 부탁을 받고 모집한 사람들이었다. 호놀룰루 스타 신문은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농장 노동 문제의 가능한 해결책.” 

해결책. 사람을 두고 그런 단어를 썼다.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영주권자가 아니라 계약 노동자였다. 10시간 노동에 일당 65센트. 계약이 끝나면 돌아가야 했다. 그 뒤 2년 동안 같은 항로를 따라 수천 명의 한국인이 더 건너왔다. 대부분 남자였다. 

1904년 호놀룰루 부두. 한국 이민선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여성과 어린이들 (Photo: 인천의정소식 제 161호)

그러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면서 노동 이민의 문이 닫혔다. 짝을 찾지 못한 한국인 남자들은 하와이에 묶였다. 그때 단 하나 남은 통로가 가족 결합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사진 한 장 들고 부산 부두에서 배에 오른 처녀들이 그 예외 조항을 따라 태평양을 건넜다. 사진 속 남자의 얼굴만 들고 호놀룰루에 도착한 앳된 처녀가 만난 남자는 사진보다 스무 살 늙은 얼굴이었다. 

그들은 영주권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그러나 영주는 했다. 60년 뒤 하트-셀러법이 영주권의 기둥 중 하나로 ‘가족 초청’을 세웠을 때, 이민의 통로는 다시 열렸다. 오늘 LA 한인타운과 뉴욕 플러싱, 애틀랜타 둘루스에 사는 모든 한인의 족보 첫 줄에 그 ‘사진신부들’이 있는 셈이다.


일손은 필요한데 사람은 받기 싫어

리오그란데 강. 텍사스와 멕시코를 가르는 그 강을 따라, 미국 이민사에서 가장 잔인한 회전문이 한 세기 동안 돌았다.

1929년 대공황이 터지자, 미국은 가장 먼저 멕시코계 이민자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1931년 2월 26일 일요일 오후, 로스앤젤레스 라플라시타 공원. 가족 산책을 즐기던 시민들 앞에 이민단속국 트럭이 들이닥쳤다. 멕시칸처럼 생긴 얼굴이면 묻지도 않고 트럭에 실렸다.1930년대 내내 약 100만 명이 멕시코로 보내졌고, 그중 60%가 미국 시민이었다. 시민권을 가졌다고 해서 안전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종이는 단속 요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1942년 2차 대전이 터지고 농장의 작물이 밭에서 썩기 시작하자, 미국은 11년 전 트럭에 실어 보낸 바로 그 사람들을 이번엔 기차에 태워 다시 불러왔다. 브라세로 프로그램. 스페인어로 ‘팔로 일하는 사람’. 

1942년부터 1964년까지 450만 건의 계약이 발급됐다. 핵심은 이 계약에 영주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일을 마치면 돌아가야 했다. 손은 필요했지만 사람은 받아 주지 않았다. 

Operation Wetback 당시 미국 국경순찰대가 멕시코계 이민자들을 트럭에 태워 추방 이송하고 있다.
(Photo: Wikipedia)

그리고 1954년 6월, 또 한 번의 회전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명명한 작전 이름은 ‘Operation Wetback’. ‘웻백’은 리오그란데를 헤엄쳐 건넌 멕시칸을 비하하는 인종 멸칭이었다. 군 출신 조지프 스윙이 군 작전 방식 그대로 지휘했다. 멕시칸 동네로 새벽에 쳐들어가 거리에서 ‘멕시칸처럼 생긴’ 사람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청문 절차도 감독도 없었다. 합법 영주권자도, 미국 시민도 그물에 함께 걸렸다. 최대 130만 명이 추방됐다. 

평균 화씨 108도, 가끔 120도까지 오르는 멕시코 메히칼리 길거리에 짐도 없이 내던져진 사람들이 미국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영주권을 가진 자도, 그 종이를 펴 보일 시간조차 없이 트럭에 실렸다. 이것이 멕시칸 이민자가 한 세기 동안 배운 교훈이었다. 영주권은 종이일 뿐이고, 종이는 누군가의 마음만 바뀌면 찢어진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부터 자신의 대규모 추방 계획을 “1954년 아이젠하워의 작전을 다시 하는 것”이라고 표현해 왔다. 모르고 한 말이 아니었다. 정확히 알고 한 말이었다. 


“수백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1965년 10월 3일, 리버티 아일랜드. 늦은 오후의 가을 햇살이 뉴욕항 자유의 여신상 횃불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책상 앞에 앉았다. 등 뒤로 뉴욕 스카이라인이 보이도록 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연출이었다. 그가 서명할 법은 하트-셀러법(Hart-Celler Act). 1924년 이래 40년 동안 영국과 북유럽 출신에게만 영주권을 활짝, 아시아 출신에게는 자물쇠를 채워 두었던 국적별 쿼터제를 폐기하는 법이었다. 영주권을 인종으로 나눠 주던 시스템이 그날 그 책상 위에서 끝났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자유의 섬에서 하트-셀러 이민법에 서명하고 있다.(Photo: Tenement Museum)

이 법은 새 영주권 발급 기준을 두 가지로 정했다. 미국 시민·영주권자의 가족 초청, 그리고 전문 기술·직업. ‘가족과 기술’ – 이 두 단어가 그날 이후 60년간 미국 영주권의 두 기둥이 됐다. 한인 1세대가 미국으로 건너온 길은 거의 모두 이 두 단어 중 하나였다. 형이 시민권을 받고 동생을 불렀고, 동생이 부모를 불렀고, 부모가 다시 다른 자녀를 불렀다. 의사가 취업비자로 들어와 영주권으로 갈아탔고, 그 자녀가 시민권을 받았다. 한인타운 전체가 이 사슬 위에 세워졌다.

존슨은 그러나 자기가 한 일이 훗날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하지 못했다. 서명에 앞서 그는 말했다. 

“이 법안은 혁명적인 법안이 아닙니다. 수백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고, 우리 일상의 구조를 다시 짜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확히 반대였다. 그가 펜을 내려놓은 그 순간부터 60년간 수천만 명의 영주권이 그 법의 문장 한 줄에 의해 발급됐고, 이는 미국 인구 구성의 지형을 바꿨다.


그들이 계속 온다

1994년 가을 저녁, 캘리포니아 거실. TV에서 30초짜리 광고 한 편이 흘러나왔다.

깜깜한 밤 멕시코 국경.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사이로 멕시칸들이 미국을 향해 달려온다. 한 명, 열 명, 수십 명…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짙게 깔린다. “그들이 계속 온다(They keep coming). 캘리포니아에 불법 이민자가 200만 명. 연방 정부는 그들을 막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그들을 부양하라고 수십억 달러를 요구한다.” 

1994년 피트 윌슨 주지사 선거 캠페인 광고 장면
(Photo: Campaign ad screenshot)

광고의 주인공은 재선에서 두 자릿수로 뒤지고 있던 공화당 주지사 피트 윌슨. 같은 날 투표용지에 올라간 주민발의안(Prop) 187호는 불법 체류자에게서 공공 의료와 교육, 모든 공공 서비스를 박탈하는 법안이었다. 투표 결과, 윌슨은 압승했고 법안도 통과됐다. 

다음 날부터 캘리포니아 공립학교 교사들은 모든 학생의 신분 서류를 확인해야 했다. 응급실 접수대 직원은 환자의 체류 신분을 이민국에 신고해야 했다. 멕시칸처럼 생긴 얼굴이면 영주권자도 시민권자도 서류를 다시 꺼내 보여야 했다. 법은 불법 체류자를 표적이라 했지만, 그물에 함께 걸린 것은 합법 영주권자였다.

윌슨은 이겼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법안 통과 직후, 캘리포니아의 라티노 100만 명이 시민권을 신청하고 유권자로 등록했다. 다시는 윌슨 같은 사람에게 자기 가족의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뒤 30년 동안 캘리포니아 공화당은 단 한 번도 주지사를 내지 못했다. 윌슨이 이민자를 무기로 이긴 그 선거가 캘리포니아 공화당의 마지막 승리였다. 

2015년 6월 16일, 도널드 트럼프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장면 (Photo: Michael Quinn Sullivan X screenshot)

그러나 21년 뒤인 2015년 6월 16일, 뉴욕 트럼프 타워의 황금빛 에스컬레이터. 부동산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가 한 층 한 층 내려와 마이크 앞에 섰다. 

“멕시코가 사람을 보낼 때, 그들은 가장 좋은 사람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문제 많은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마약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범죄를 가져옵니다. 그들은 강간범입니다.” 

‘그들이 계속 온다’의 변주. 윌슨의 각본이 캘리포니아를 떠나 미국 전역으로 무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륙은 합법, 착륙은 불법

2017년 1월, 트럼프 취임 100일째 금요일 저녁. JFK 공항 4번 터미널.

백악관 집무실에서 펜을 든 트럼프는 행정명령 13769호에 서명했다. 이란,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시리아, 예멘. 일곱 개 나라 국적자의 입국을 즉시 중단했다. 발표는 변호사들이 퇴근한 금요일 오후 늦게 나왔다. 의도된 시점이었다.

그 순간 대서양 위에서 비행기들이 미국을 향해 날고 있었다. 이륙할 때는 합법 비자였다. 착륙할 때는 입국 거부였다. JFK 공항 4번 터미널 입국장. 시리아 출신 박사학위 소지자가 짐을 들고 서 있었다. 미국 시민의 이라크 출신 약혼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연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2017년 1월 28일, JFK 공항 터미널 4에 모여든 시위대
(Photo: Ted Alexandro X screenshot)

그러나 그날 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주권자들의 처지였다. 처음 며칠 동안 7개국 출신 그린카드 소지자는 영사관에서 다시 입국 허가를 받아야 했다. 사례별 심사를 거쳐야만 미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5년, 10년 전 영주권을 받고 미국에 집을 사고 자녀를 학교에 보낸 사람들이 의심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린카드가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Now / What’s Next

그린카드가 흔들린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영주권은 더 이상 정착의 끝이 아니다. 언제든 다시 검토될 수 있는 임시 신분이 됐다. 누가 백악관에 앉아 펜을 드느냐에 따라, 어제 발급된 그 종이가 오늘 의심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번 USCIS 발표로 당장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의회가 만든 법 자체를 USCIS가 바꿀 수는 없다. 1952년 이민국적법(INA) 제245조가 규정한 신분 조정 권리를 행정정책이 부정할 권한은 없다는 것이 다수 이민 변호사들의 진단이다. 곧 소송이 시작될 것이고, 메모가 던진 그물이 얼마나 넓을지는 결국 법원이 결정할 것이다. 변호사들의 일치된 조언은 분명하다. 신청을 철회하지 마라. 미국을 떠나지 마라. 진행 중인 케이스는 그대로 진행하라.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작된 AI 이미지 (Photo by FRAME.)

그러나 결정이 어떻게 나든, 한인 이민자가 지금 점검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본인과 가족 각자의 비자 상태를 정확히 아는가. 영주권 신청은 어느 단계에 와 있고, USCIS 접수일은 언제인가. 시민권 신청 자격이 되는데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한인 1세대는 시민권을 받지 않고 영주권에 안주한 비율이 다른 이민자 그룹보다 유난히 높다. 한국 부동산 처분이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다는 이유로. 아직 한국 국적이 편하다는 이유로. 그러나 영주권자와 시민권자 사이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점점 더 깊은 골이 패이고 있다. 

미국 대통령 임기는 4년이다. 그 안에 행정명령 1장, USCIS 메모 1장으로 영주권의 의미가 흔들릴 수 있다. 물론 다음 대통령이 그것을 다시 뒤집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시계추처럼 오가는 동안 망가진 가정과 폐업한 사업, 흩어진 가족은 누구도 되돌려 주지 않는다. 영주권은 정치의 인질이다. 인질을 쥔 손이 바뀔 때마다 인질의 운명은 매번 다시 흥정된다.


글. 이승은 (Eunice Lee) / Frame. No.18 2026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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