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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한번, 그거면 충분해

연극을 사랑해 평생을 무대에 살았던 한 여배우가 있다.

올해 91세. 백발의 그녀는 지금도 대본을 읽고, 시를 낭송하고, 무대 위 조명 아래 서고 싶어한다. 몸은 천천히 쇠해 가지만,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만큼은 처음 무대에 오르던 그날과 다르지 않다.

이번 이너뷰의 주인공은 원로 배우 김복희다. 수도여중고와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거쳐 기독교방송 성우로 출발해 탤런트로 20년을 활동하며 ‘농녀’, ‘농토’, ‘유리동물원’으로 굵직한 여자연기상을 차례로 거머쥔 사람.

2005년 애틀랜타로 이민 와서도 무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화려한 이력 뒤에는 누구나처럼 그녀만의 굴곡진 삶이 있었다.

소녀 시절 38선을 넘던 피난의 기억. 열다섯 살에 친구들 손을 끌고 입대한 6·25 여군 시절. 평생을 함께한 영화감독 남편과의 만남과 사별. 그리고 이 모든 시간 너머,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했던 아픔 하나.

4시간 넘는 인터뷰와 그녀의 자서전을 토대로 무대 뒤 그녀의 자취를 따라가 봤다. 함께 공감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91년의 세월을 살아낸 한 여배우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송수정, 나의 할머니

기자: 어린 시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신가요.

김복희: 우리 할머니. 송수정. 어릴 때 이름을 알게 됐는데, 할머니라는 느낌과 어울리지 않는 그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어. 할머니는 아들만 셋을 두셨고, 나는 그 큰아들의 맏딸이었지. 집안 내에서는 물론이고 고향에서도 소문난 손녀딸이었어.

나는 할머니 방에서 키워졌고, 우리 엄마는 젖 먹일 때만 나를 안아 볼 수 있었어. 젖 먹이다 아기랑 눈 맞추면 정 든다고 할머니가 저고리 앞섶을 들어 아기 얼굴을 가리고 먹이게 했대. 그래서 앞섶에 엄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 하더라고. 지독한 시집살이를 한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머니가 좋았어.

해방 후 소련군이 이북에 들어오자 아버지와 엄마, 동생 둘은 38선을 넘어 서울로 피난을 가셨어. 나는 할머니가 놓지 않으셔서 부모님과 생이별로 반년 이상을 지냈지. 할머니 앞에서는 엄마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할머니가 서운해하실까 봐. 그렇지만 매일 밤 이불 속에서 울었어.

김복희 배우 학창 시절 (Photo courtesy of Kim Bok-hee)

어느 날은 결심하고 잠꼬대를 하는 척 연기를 했지. “엄마… 엄마…” 정말로 울며 엄마를 불렀어. 그 일이 있은 뒤로 할머니가 내 앞에서 자주 우시더니만 안내원을 물색해서 나를 서울로 보내기로 하신 거야.

안내원 아저씨를 따라 기차를 타고 38선 부근 어느 집에 숨어 있다가 새벽에 산을 넘어 임진강을 건넜어. 뒤에서 들리는 따발총 소리는 소련군이라며 숨소리도 못 내게 하셨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아저씨 목마를 타고 아저씨 이마를 꽉 잡고 강을 건너 이남 땅에 오니 먼동이 텄어. 젖은 운동화에 작은 자갈들이 달라붙었더라고. 겨울도 아닌데 그 감촉이 잊히지가 않아.

이듬해 할머니는 고향집을 정리하시고 안내원을 따라 서울로 오셨어. 매일 점심시간에 맞춰서 내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로 찾아오셨는데, 쪽진 머리의 시골 할머니 모습이 챙피해서 도시락만 휙 낚아채서 교실로 왔던 생각이 나.

할머니는 60대에 청각을 잃어 가셨지. 보청기도 몰랐던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가 참 불쌍해. 내가 노역 연기를 할 때면 할머니를 상상하며 연기를 했어. 생전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TV 드라마 속의 내 연기를 보며 “너는 참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라고 하셨지. 가끔 할머니 꿈을 꿔. 나는 아직도 할머니 냄새를 기억하고 있어.


열다섯 살, 여군이 되다

기자: 학창 시절에 전쟁이 났지요. 그날을 기억하세요?

김복희: 그날 낮 명동 시공관에서 음악회가 있어 객석에 앉아 있었어. 내 무릎엔 선배 언니가 안겨 준 꽃다발이 있었고, 우리 학교 송진혁 선생님의 독창이 끝나면 내가 꽃다발을 증정하기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돌연 음악회가 중단되면서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휴가 중인 군인은 즉시 귀대하라.”

웅성거리며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두려운 맘으로 군중 속에 밀려 극장 밖으로 나왔어. 전차를 타고 남영동에서 내려 걸어오는데 골목 어귀에서 나를 기다리던 엄마가 동생을 업은 채 달려와 손을 잡으시며 안도의 한숨을 쉬셨어. 그날 새벽 38선에서 북한 인민군이 남침했다고 했어.

바로 5년 전,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북한에서 서울로 남하한 우리 가족은 공산당을 무서워했기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초죽음의 표정이었어. 암울했던 6·25 전쟁 3개월간 공포와 배고픔을 겪은 나는 철부지 15세 사춘기 문학소녀에서 ‘유관순 열사’나 프랑스의 ‘잔 다르크’로 변해 갔어. 피로 멍든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애국 소녀가 된 거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국군이 인민군을 북으로 몰았어. 3개월 만에 학교를 갔더니 게시판에 여중생 ‘장병 위문 예술대원’ 모집 공고가 붙어 있는 거야. 같은 반 절친 고홍숙과 최도영과 나는 의기투합해 오디션을 거쳐 입대했어. 우리 나이 열다섯. 대원 전원이 서울 여중생으로 한성여중 밴드부까지 합쳐 30명이었어.

15살 여군 김복희 (Photo courtesy of Kim Bok-hee)

교복을 벗고 허수아비같이 큰 남자 군복을 입고는 어린 여군이 되었지. 1951년 1월 4일 공연 연습 중,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우리는 인천에서 LST 군함을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어. 부모님을 떠난 나는 밤마다 가족이 그리워 이불 속에서 몰래 울며 지냈어.

대원들은 최전방 일선에 있는 6, 7, 9, 11사단의 간이무대에서 위문 공연을 다녔어. 프로그램은 독창, 합창, 무용, 밴드 순으로 진행했고, 나는 MC까지 맡았지. 일선 위문 공연 중 추운 밤 중공군의 습격으로 풍비박산이 되어 죽음을 면했던 일도 있었어.

대원 중 일부는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가족을 만나 가버렸고, 외출 나갔다가 탈영하기도 했지만, 나는 영창이 무서워 마지막까지 있었어. 이후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예술대 전원은 복학을 위해 단식 투쟁까지 하며 제대를 원했어. 결국 1년 만에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 학교로 갔지.

그 시절 어려서 용도를 몰랐던 군번 목걸이가 있었는데, 이제 와서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해줘서 고마워. 정부에서는 전쟁 유공자로 인정해서 사후 국립묘지에 안치해 준다고 해.


여보, 잘 가세요

기자: 2012년에 남편분을 떠나보내셨죠.

김복희: 남편이 떠나고 유해를 5개월간 집안 깊숙이 두었어. 한국에 나가면서 드디어 그의 유해를 꺼냈지. 우리 둘의 역사가 서려 있는 동해로 갔어. 넓은 바다는 남편을 부르는 듯 높은 파도를 일으키며 웃고 있는 듯하더라고.

남편과의 50여 년 삶에서 행복했던 일, 불행했던 일들을 회상하며, 평소 북에 계신 어머니 묘소 옆으로 가고 싶다던 소원대로 동해바다 파도를 타고 고향으로 가도록 떠내 보냈어.

남편과는 여전히 꿈속에서 생전처럼 함께 지내. 내가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해도 남편을 만난다는 확신만 있으면 웃으며 갈 것 같아.


무서운 밤바다와 젊은 교수

기자: 정일몽 교수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김복희: 내가 스무 살 대학생 시절, 그는 젊은 교수로 학생 계몽대를 만들어 USIS 미국 공보실에서 빌린 영사기로 강원도 작은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계몽 영화를 상영했어. 남녀 대학생 대 여섯 명이 함께 갔는데, 집에는 여학생만 간다고 속여서 떠났지.

첫날 밤 해변에서 합창을 하며 놀고 있다가 너무나 무서운 밤바다를 보았어. 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마치 무서운 괴물이 다가오는 것 같은 착각에 겁 많던 나는 엄마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지. 몇 년 후 그 교수는 내 남편이 되었고, 가끔 동해바다로 함께 여행을 갔지만 역시 밤바다는 무서워서 볼 수가 없었어.

정일몽 교수는 KBS TV 창설 요원이었고, 원로 영화감독이자 평론가로 활동했다.(Photo courtesy of Kim Bok-hee)

우리 남편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왔어. 그런데 한국에 와서 영화를 하려니 한국 영화계의 수준과 잘 맞지 않았지. 이 사람은 배운 대로 콘티를 전부 세세하게 다 그렸거든. 주인공의 마스크 하나하나 다 그리면서 작업을 했는데, 당시 한국의 조감독이나 카메라맨들은 현장에서 대충 하던 사람들이라 미국 유학생 출신인 남편이랑은 맞지가 않았던 거야. 제작비도 많이 든다고 하고.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어려웠어. 그런데 남편이 공부하고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들을 유학 보내는 바람에 빠듯한 생활을 해야 했지. 내가 아들네 돈 부쳐 주려고 드라마 촬영 안 쉬고 이 역할 저 역할 맡아가며 정말 열심히 살았어.


“그리 예쁘던 얼굴이…”

기자: 부부로 사신 50여 년, 가장 마음에 남는 모습이 있다면요?

김복희: 남편은 몇 년째 녹내장 말기라서 점점 앞이 안 보인다고 호소했어. 십여 년간 작업한다고 눈을 너무 혹사해서 망막이 상한 거지. 게다가 집안 내력 때문에 청력까지 잃어갔어. 결국 수십 년 강의한 것이니 수업은 할 수 있어도 질문하는 여학생 목소리가 안 들린다며 정년퇴직을 앞두고 서둘러 학교를 그만두었지.

그즈음 더 안 보이기 전에 당신 얼굴을 똑똑히 보고 싶다며 내 얼굴을 감싸 안더라고. 이내 “그리 예쁘던 얼굴이 이렇게 늙어 버렸어”라며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눈물을 보이는 거야. 나는 눈물을 참으며 장난스럽게 “나도 당신 얼굴 좀 똑똑히 보자”라며 남편의 얼굴을 감싸고 들여다 보는데 동공이 흐려진 남편의 눈과 늙고 초라해진 마른 얼굴이 너무 가엾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어. 그만 둘이 얼싸안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지 뭐야.

남편과 행복했던 시절 (Photo courtesy of Kim Bok-hee)

기자: 금실이 아주 좋으셨나 봐요?

김복희: 내가 웬만한 거 다 해봤는데 이혼을 못 해봤어(웃음). 부부가 그렇지만 늘 좋을 순 없잖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영화감독을 했던 남편은 인기가 많은 교수였어. 주변에 늘 젊은 제자들이 많다 보니 마음이 쓰이는 일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그랬어. “나 죽으면 망설이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 그래서 내가 큰 소리로 냅다 대답했지. “아휴, 늦었어!”


명동, 그날의 한마디

기자: 인생에서 가장 힘드셨던 일이 있다면요?

이 질문에 이르러, 백발이 성성한 여배우는 눈을 감았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50년 가까이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말들을 할까 말까. 긴 침묵 끝에, 그녀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김복희: 나는 아주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가난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니고, 시험도 떨어져 본 적 없고 뭐든지 순탄했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장가가고 나서부터… 누가 나를 배척한다는 거 정말 마음 아픈 일이야.

우리 아들이 아기 때부터 엄마를 엄청 좋아했어. 성격도 좋고 정말 잘 컸어. 공부도 썩 잘했지. 고대 수석으로 입학해서 4년 장학생으로 다닐 정도로 우수했거든. 그래도 피는 못 속여. 나는 1등으로 학교에 들어간 애가 대학교 가서도 왜 저렇게 공부를 하나, 왜 방에 불이 안 꺼지나 했더니 그게 희곡을 쓰느라 그랬던 거였어.

고대 1학년 때 과별로 연극을 했는데, 엄마 구경 오라고 해서 갔지. 아들이 연극 연출을 직접 했더라고. 공연장에 내가 들어가 앉아 있으니까 갑자기 와서, “엄마, 혹시 립스틱하고 눈썹 연필 있어요? 아무래도 분장을 좀 시켜야 되겠어요”라고 해서 내가 빌려줬어.

얼마나 연극을 재밌게 했는지 몰라. 버스 안의 군상을 아주 잘 그려냈어. 칫솔 팔고 빗 팔고 나가는 사람들. 소품과 의상도 우리 집에 있던 걸 다 가져갔더라고. 우리 아들이 마지막에 할머니 분장을 하고 “이거 어디 가요?” 그러고 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수건을 쓰고 치마를 걸치고 있다가 내릴 때 치마가 팍 내려가니까 남자 빤스가 나오더라. 보니까 아버지 빤스를 훔쳐 입은 거야. 내가 죽는다고 웃었어. 그렇게 재능도 있고 끼도 있고, 그때까지도 내 새끼였지.

2007년 애틀랜타 연극협회 정기공연 ‘어머니’ 포스터
(Photo courtesy of Kim Bok-hee)

축제 때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데, 인형 같은 아이를 누가 소개했나 봐. 고대 축제에서 처음 보자마자 둘이 그냥 사랑에 빠져 가지고… 어느 날 고대 잡지 표지에 우리 아들이 어떤 조그만 아이하고 개나리꽃 구경하는 걸 어떤 기자가 몰래 찍은 게 나왔어. 누구냐 그랬더니 축제에서 만난 아이라고 얘기하는데 하여튼 삼수생이래. 그 말 듣고 속상한 거야. 우리 집안에 그런 애가 없거든. 그런데 아이는 아주 인형이야, 인형. 거기에 흠뻑 빠져서… 저희끼리는 첫사랑이니까 어쩌겠어.

아들 결혼할 때 예단을 사러 명동에 나갔었어. 며느리가 될 애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유명한 옷집에 가도 맞는 게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 남편이랑 아들 뒤에 가면서 장난으로 웃으며 “유아복 집에 가야 되겠다”라고 했어. 나는 아들이랑 워낙 장난도 잘 치고 그런 사이니까 그랬던 건데, 아들이 딱 돌아서서 정색을 하더니 “엄마, 그게 그렇게 재밌어요?” 그러는 거야. 그때부터 서서히 내가 알던 아들이 이제 아니구나 싶더라고.

결국 결혼시켜서 유학을 보냈지. 그러고 나서 아들과 멀어졌어. 며느리 입장에서 시부모가 너무 싫었나 봐.


“복희야, 너 결혼 전에 반대했니?”

기자: 며느님이 상처가 깊으신가 봐요.

김복희: 내가 아는 선배 언니가 그러더라고. “복희야, 너 결혼 전에 반대했니?” 하고 묻길래, “반대라기보다는 우리 아들에게 맞는 더 나은 며느리를 생각하긴 했죠. 근데 우리 남편이 무릎 꿇려 놓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심하게 반대하긴 했어요”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 언니가 이런 말을 해 줬어.

“얘, 내 딸도 무용한다고 시댁에서 그렇게 반대했어. 그랬더니 내 딸이 시댁에 평생 복수하며 산다고 하더라고. 시부모님이 일본에 있는데, 일본 여행을 가도 시댁엔 안 들르고 온대. 명품 백을 사도 나만 사주고, 시어머니는 안 사주고. 내 딸이지만 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죽 한이 맺혔으면 저러나 싶다.”

결혼 전에 반대하면 그게 그렇게 한이 되나 봐. 그때는 이리 될 줄 몰랐지. 하….

아들 내외에게는 또 다른 사정과 마음이 있을 것이다. 부모를 향한 미안함과 아내를 향한 의리 사이에서 아들도 그 나름대로 평생을 견뎌 왔을 테고, 며느리의 입장에서 시부모의 반대는 평생 잊히지 않는 상처였을 테다. 결혼 전 반대는 새 가정의 출발선 위에 놓인 깊은 금이 됐다. 그 금을 끝내 메우지 못한 채,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왔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이라 믿은 선택을 하면서.


벽을 보고 우는 남편

기자: 최근에 아드님 만나신 적 있으세요?

김복희: 오래 전 남편이 혼자 미국에 갔는데, 아들 집에 못 들어가고 환영도 못 받았어. 나는 그걸 몰랐어. 남편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는데 아주 다 죽어서 왔더라고. 몸이 약한 사람이 완전히 시체가 돼서 왔길래 내가 성신병원에 입원을 시켰지. 촬영 마치고 입원실에 갔는데,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도 벽만 보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 왔어요” 했더니 등 돌린 채 흐느껴 우는 거야. 대체 미국 가서 뭘 보고 왔길래 남자가 저렇게 우나 싶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애들 집에 못 들어가고 근처 호텔에 머물다 왔다고 하더라고.

남편이 손주들만은 꼭 보고 가고 싶다고 해서 아들이 손주 둘을 차에 태워서 호텔로 데리고 왔었대. 계단 위에서 애들이 올라오는 거 보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웠나 봐. 한국말도 못하는 아이들이 할아버지한테 덥석 안기니까 얼마나 좋았겠어. 애들이 계단 올라오던 모습을 흉내 내면서 계속 얘기하더라고. 우리 남편은 남탕에 가서 손자 때 밀어주고 오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러워했었는데…

김복희 배우의 거실에 놓인 추억의 사진들 (Photo by Eunice Lee)

공학 박사까지 딴 아들이 골든 게이트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됐어. 본인도 부모랑 남남처럼 지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으면 목사가 됐겠나 싶어. 기도 많이 했겠지. 작년인가 재작년에 65세로 목회도 은퇴했대.

12년 전 남편 장례식 때 아들이 와서 하루 자고 갔어. 내가 패혈증에 걸려 수술할 때도 한 번 왔지. 다 죽어갈 때 눈을 뜨니까 우리 아들이 옆에서 막 기도를 하고 있더라고. 그땐 죽을 줄 알고 까만 옷도 다 가져왔었대. 그런데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걸 보더니 그다음 날 강의가 있다고 가더라고. 서운했지만 책임감이 강한 아이라서 그렇다고 이해했지.


“플러그를 빼”

기자: 그렇게 멀어지신 지가 벌써 오래됐네요.

김복희: 지금 내가 아들 만난 지 한 7, 8년 됐는데, 오늘 한국은 어버이날이잖아. 연락도 없어. 엄마한테 마음에 꽃다발이라도 보내면 얼마나 좋아… 수년 전 어버이날에도 내가 너무 속이 상해서 못 참고 연락해서 화를 냈어. 그랬더니 “어머니, 여기는 어머니날이 5월 10일이에요” 하더라고. 그 말 듣고는 아이고 또 내가 이틀을 못 참고 마음이 급해서 그랬나 싶어 미안했지. 그런데 마더스데이에 ‘해피 마더스 데이’ 문자 한 통 오고 말더라고.

내 주변에 아들 키운 엄마들이 다 슬픔을 갖고 있어. 그래서 내가 엄마들한테 플러그를 빼라고 했어. 꽂고 전기가 들어오는지 안 들어오는지 자꾸 생각하지 말고 빼야 한다. 엄마들이 다들 공감하더라고.

전기가 안 들어오는 콘센트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녀는 너무 잘 알았다.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에게 던진 “플러그를 빼라”는 말은 누구보다 본인에게 매일 되뇌는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 소원

기자: 마음속에 품은 소원 하나가 있다면요?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오랫동안 식탁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복희: 28살 때 유학 가던 그 모습 그대로 내 마음속에서 아들은 여전히 28살로 남아 있어.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아. 내 속의 이런 아픔을 아무도 몰라. 누구한테 말하겠어. 그냥 가슴에 담아 두는 거지. 나 같은 마음을 가진 부모들도 많을 거야. 다들 말을 못해서 그렇지.

지금 아마 걔가 67살일 거야. 나는 손주들 시집장가 가는 것도 못 봤어. 증손자도 났다는데 행여라도 불화를 겪는 게 겁이 나서 가 보고 싶다는 말도 못 해. 아들도 이제 할아버지가 됐으니, 손자가 얼마나 예쁘겠어. 지 엄마가 아기들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걸 못 보고 사는 마음이 어떤지 알 텐데도…

젊은 시절 김복희 배우 (Photo by Eunice Lee)

최근 애틀랜타 연극협회 후배들이 광복절 공연 앞두고 나더러 무대에 올라가서 내레이션을 해 달라고 하는데 내가 공연 망칠 일 있냐고 했어. 나는 언제 하늘나라 가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나이야. 괜히 무대 올라갔다가 긴장해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애들 있는 곳에 가보고 싶어도 이제 비행기 타기도 겁이 나는 나이가 됐어.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필요 없고, 아들이 내 손 한번 잡아주면 그걸로 다 될 거 같아. 피가 통하듯이 그냥 다 통할 거 같아. 그거면 충분할 거 같아….


노란 원피스의 어버이날

화려한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물을 연기해 온 91세의 여배우. 한국 연극계의 굵직한 상들을 손에 쥐어 본 사람. 그런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대단한 이해도, 장문의 편지도 아니었다. 손 한번. 그저 손 한번. 무대 위에서는 늘 누군가가 되어 살았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여전히 자식의 손길을 기다리는 한 어머니였다.

인터뷰 일정을 잡고 보니 어버이날이라는 걸 알게 된 기자는 봄을 엮은 꽃다발과 초콜릿을 준비해 노인 아파트를 찾았었다. 작은 선물에 어린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신 선생님은 장시간 인터뷰가 끝난 뒤 기자의 팔짱을 끼고 차까지 바래다 주셨다. 리라 초등학교 교복을 연상케 하는 노란색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고 연신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면서.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시는 선생님을 남겨두고 오려니,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쯤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글에는 차마 담지 못할 수많은 사연들을 그렇게 게워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만으로는 도저히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를 때가 있다. 그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은 결국 용서일지도 모른다. 받는 쪽도 주는 쪽도 정해져 있지 않은, 그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일 같은 것 말이다.

2026년 5월 8일 어버이날 김복희 선생님 (Photo by Eunice Lee)

글. 이승은 (Eunice Lee) / InnerView. No.18 2026년 5월 27일

김복희 배우 연혁

  • 서울 수도여중고 졸업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졸업
  • 기독교방송국 HLKY 1기 성우
  • TBC 1기 성우
  • 제1회 대학생 방송극 경연대회 여자연기상 수상 ‘백일몽’
  • 대한민국 연극제 여자연기상 수상 ‘농녀’
  • 한국일보 예술상 여자연기상 수상 ‘농토’
  • 동아일보 연극상 여자연기상 수상 ‘유리동물원’
  • MBC, KBS, SBS 탤런트로 20년간 드라마 영화 출연
  • 2005년 애틀랜타로 이민
  • 애틀랜타 연극협회 ‘울고 넘는 박달재’ 공연 어머니 역
  • 애틀랜타 연극협회 연극 ‘어머니’ 역 공연
  • CBS ‘김복희의 금요 데이트’
  • 제일한국학교 교사
  • 2012년 남편 사별
  • 남편 추모 시집 발간
  • 카페로뎀 ‘가을맞이 김복희의 시낭송’ 1, 2회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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