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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의사

미국에서 의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공부를 잘한 사람을 떠올린다. 긴 레지던트 과정을 버텨낸 인내심, 두꺼운 교과서를 뚫고 나온 지식.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 사람을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명함에 적힌 한 줄 뒤에는 수천 가지 삶의 결이 켜켜이 쌓여 있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잃고 되찾고,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빚어진 것들.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완성된 현재이지만, 그 현재를 만든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한 과거의 무수한 하루들이다.

강창석. 애틀랜타의 내과 의사이자 매년 두 차례 선교를 떠나는 장로. 그 소개만으로는 이 사람을 알 수 없다. 그가 걸어온 길은 의사라는 두 글자가 품기엔 예상치 못한 굽이들이 참 많았다.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네 번 죽다 살아난’ 사연

의사가 되기 전, 그는 먼저 시대의 한복판을 통과해야 했다. 1970년대 서울대 의대 캠퍼스는 청진기보다 구호가 더 익숙한 곳이었다.

기자: 청년 강창석은 어땠나요?

강창석: 1973년에 서울대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가 시대를 짓누르던 때였어요. 본과 1학년 때 과대표를 맡으면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던 문리대 학생들과 어울리게 됐고, 시국을 걱정하다가 대의원 대표로까지 활동하게 됐습니다.

1975년 4월 3일 관악캠퍼스 시위로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모습 
(「대학신문」, 1975.4.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1975년, 결국 데모를 주동하다 잡혔습니다. 잡히면 제명, 제명되면 곧바로 군대로 끌려가던 시절이었어요. 동대문에서 붙잡혀 보름 가까이 갇혀 있었는데, 당시 의과대학장이셨던 권이혁 교수님이 저를 포함한 의대생 4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참 정치력이 있는 분이셨어요. 정보부와 국가를 상대로 실랑이를 벌이시며 ‘제명’을 ‘무기정학’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네 번이나 반복하셨죠. 풀려나서 인사드리러 갔더니 학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너희는 네 번 죽었다 살아난 놈들이다.”

고(故) 권이혁(1923~2020) 박사(왼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장(1970-1976)을 역임했다. 서울대 의대 1회 졸업생으로 서울대 총장, 문교부/보건사회부/환경처 장관 등을 지내며 대한민국 보건의료 및 교육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형성』 제6권 제1호(오른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발행한 간행물.1973.11.30. (임선웅 기증)

덕분에 1975년 한 해를 무기정학 상태로 서울 시내를 활보하며 보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잡혀서 군대에 가 있었지만, 의대생은 군의관 장교 후보생 신분이라 일반병으로 징집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복학해야 하는데, 발표가 안 나는 겁니다. 피가 마르는 기다림이었어요. 결국 복학 하루 전날에야 무기정학이 풀렸습니다. 끝까지 사람을 애태우더라고요.


다섯 명의 감시자, 탈출 같은 이민

복학은 했지만 자유는 돌아오지 않았다. 네 번 죽었다 살아난 대가는 졸업장을 받는 날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기자: 복학 이후의 삶은 어떠셨나요? 미국에는 언제 오시게 됐죠?

강창석: 복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제 삶은 철저한 감시 아래 있었습니다. 저 한 명에 붙은 감시자가 다섯이었어요. 정보부 요원, 동대문경찰서 형사, 학년 담임교수, 학교에서 지정한 저명한 교수인 이문호 교수님, 그리고 검찰청 검사까지. 방학 때면 노량진 경찰서 형사가 리포트를 쓰기 위해 집까지 찾아왔고, 담당 검사는 가끔 일식집으로 저를 불러내 밥을 사주며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러다 졸업 즈음에 10·26 사태가 터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박정희 대통령 서거가 저에게는 기회였어요. 당시 본과 4학년이었는데, 미 8군 병원에서 산부인과 로테이션을 하고 있었거든요. 미 8군 캠퍼스는 일반인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그 안은 완전히 미국이었습니다. 코카콜라도 마셔 보고 미국 병원 시스템을 처음 경험하면서 신기해했었죠. 그런데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병원이 셧다운되는 상황을 눈앞에서 겪었습니다.

10.26 사태 (Photo: 경향신문 by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통령이 계속 있었다면 아마 저는 감시 때문에 이민을 가기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식구들은 이미 다 미국에 가 있었고 저만 혼자 남아 있었는데,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그 틈에 한국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1980년 3월, ‘서울의 봄’이 찾아올 무렵 의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1981년 미국 땅에 첫발을 디뎠죠.

‘계엄철폐’, ‘유신잔당 척결’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대학신문」, 1980.5.12.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1979년 10·26 사태로 유신 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학원가에 짧은 봄이 찾아왔다. 1980년 1월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교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제적된 학생들의 복학과 해직 교수의 복직을 결정했다. 다섯 명이 지켜보는 삶에서 벗어나는 데는 역사의 균열이 필요했다. 한 나라의 비극적 사건이 한 청년에게는 유일한 탈출구가 됐다. 그렇게 그는 감시자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동방의 예루살렘에서 온 집안 

그의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서울이 아니라 평안북도 선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앙과 교육, 그 두 줄기가 이 집안을 관통한다.

기자: 가족사가 궁금합니다.

강창석: 1남 6녀 중 외아들로 태어나 참 귀하게 자랐어요. 저희 집안은 해방 전후에 평안북도 선천에서 월남했습니다. 선천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신앙이 깊은 곳이었어요. 주일이면 온 도시가 문을 닫을 정도였고,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던 동네였습니다. 저는 할머니 때부터 3대째 모태신앙이에요. 주변 친척이 전부 교회에 다녔으니 크리스천의 삶이 당연한 거였고, 제사나 족보라는 개념은 들어본 적도 없이 자랐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 교회에 다니는 줄 알았을 정도였죠.

월남 후에는 한경직 목사님이 계신 영락교회에 다녔습니다. 저희 이모부가 1920년대 초에 프린스턴으로 유학을 다녀오신 선각자이신데, 그때 한 목사님과 친구로 지내셨거든요. 해방 후 미 군정 시기에 이모부는 이북에서 내려온 숭실, 보성, 정신, 오산 같은 기독교 학교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부지를 확보해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의사들의 아메리칸 드림

그가 미국에 온 1981년, 베트남 전쟁 이후 한국 의사들에게 열려 있던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기자: 가족들이 먼저 이민을 오셨다고 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강창석: 저희 식구들의 이민 역사는 60년대 후반, 의사였던 둘째 매형부터 시작됐습니다. 월남전쟁 때문에 미국 군의관들이 대거 차출되면서 미국 내 의사 인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졌거든요. 서독에 광부나 간호사를 보내듯, 그때 한국 의사들이 굉장히 많이 왔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오신 분들은 병원 과장들이 공항까지 짐을 받아 주러 나오고, 집을 제공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어요. 하지만 제가 온 81년은 월남전이 끝나고 수습이 된 뒤라, 그 입구가 완전히 막혀 있었습니다.

헬스원 케어 자신의 오피스에서 강창석 원장(Photo: Eunice Lee)

기자: 베트남 전쟁 전과 후가 그렇게 달랐군요.

강창석: 서울대 의대 63년이나 64년 졸업생의 경우, 한 클래스 100명 중 60~70명이 미국에 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혜택이 다 끊긴 뒤, 힘든 시기에 온 사람입니다. 그래도 당시엔 미국에 이민 간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했어요. 김포공항에 배웅 나올 때 친척들이 예식장에 가듯 정장을 차려입고 와서 손을 흔들던 시대였죠.


300장의 지원서, 침 마를 때까지

미국 땅을 밟았다고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의대 졸업장은 이 나라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수백 장의 지원서와 간절함뿐이었다.

기자: 미국에서 시작된 삶은 어떠셨나요?

강창석: 미국에 오긴 했지만 의사가 되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병원 자리를 얻으려고 지원서를 300장, 400장씩 써서 보냈어요. 봉투 스티커에 침을 발라 붙이다가 나중에는 토할 뻔했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매달렸죠.

인터뷰에 가면 돌아오는 질문은 두 가지뿐이었어요. “영어 할 줄 아냐”, “미국 병원 경험 있냐.” 영어도 못하고, 경험을 쌓으려고 인터뷰하러 온 사람한테 경험이 있냐고 물으니 참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제 사촌 형님이 세계적인 판화가인 황규백 화백인데 그 형님 스튜디오에서 머물면서 뉴욕의 병원들을 하나하나 두드렸지요. 그러던 끝에 기적적으로 뉴욕 메디컬 칼리지 외과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외과는 ‘피라미드 시스템’이라 불리는 혹독한 구조였어요. 10명이 시작하면 2년 차까지는 같이 올라가지만 3년 차부터 인원을 확 잘라냅니다. 마지막 5년 차 치프 레지던트에는 한두 명만 남게 되죠. 

저는 영어도 서툴렀고, 그저 ‘저렴한 노동력(cheap labor)’에 불과했습니다. 수술할 때 배를 가르면 옆에서 잡아당기는 리트랙션이나 하고, 스펀지로 피 닦고, 아침마다 드레싱 바꾸는 게 일이었죠. 제가 여기서 잘려 나갈 ‘1순위’라는 걸 직감했어요. 능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없는 노동자 계급이었으니까요.

10명이 시작해 한두 명만 살아남는 피라미드. 그 안에서 영어도 서툰 한국인 의사는 자신이 첫 번째로 잘려 나갈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외과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던 정신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22살 미대생 앞에서 손을 들다

강창석: 사실 저는 정신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학생 때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데, 22살짜리 미대생이 자살 시도를 해서 실려 왔어요. 그런데 정신과 레지던트들이 그 젊은 여자에게 ‘정신분열증(조현병)’이라고 진단을 내리는 겁니다. 제가 손을 들고 이의를 제기했죠. “내가 보기엔 이 학생이 정신적인 방황 끝에 자살 시도를 한 건 맞지만, 이 젊은 사람에게 정신분열증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면 앞으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요.

의사는 정확한 진단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웰빙과 ‘퓨처(future)’, 즉 이 사람이 앞으로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치료하고 케어하는 게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인격장애(personality disorder)’ 정도로 진단하고 관리해 나가는 게 이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볼 때 훨씬 적합한 치료가 아니겠냐고 도전했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눈에는 그게 의사들이 다 미쳐서 그런 진단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통찰력이 남들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기자: 그런 남다른 통찰력이나 의사로서의 가치관은 어디서 형성된 건가요?

강창석: 어머니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과 육을 고치는 의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어요. 저도 자라면서 그 소명을 충분히 알고 있었죠. 제게는 멘토가 세 분 있는데, 신앙적으로는 임명수 목사님,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의 슈바이처, 마지막으로 신학자이자 의사인 폴 투르니에입니다. 투르니에는 환자의 어느 한 부분만 보는 게 아니라 영과 육 전체를 보며 치료하는 분이었죠.

제 병원에 써 붙여 놓은 모토가 ‘Healing One at a Time’입니다. ‘Healing One’에는 한 사람의 영과 육을 다 고치겠다는 의미가 있고, ‘at a Time’에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그 두 가지를 다 보면서 온전히 치료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8시간 인터뷰와 15분의 기적

기자: 그래서 정신과로 가셨나요?

강창석: 뉴욕 시라큐스 대학교 정신과에 어플라이해서 8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중 어떤 교수가 “한국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한국전쟁을 우리 민족 전체의 ‘사이키아트릭 트라우마(psychiatric trauma)’라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 자식을 잃은 부모, 땅을 잃은 사람들까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트라우마가 온 국민에게 박혀 있다고요. 하지만 한국인들이 70년 동안 전 세계 기록에 없는 발전을 이룬 것은, 교육에 대한 열정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드라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죠. 인터뷰 반응이 아주 좋아서 합격이 확실시된 상황이었습니다.

기자: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죠?

강창석: 추수감사절을 맞아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매형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매형이 “정신과는 힘들고 뉴욕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세인트루이스로 이사 와서 내과를 하라”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급하게 세인트루이스 병원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봤는데, 이미 인터뷰 시즌이 다 끝났다는 겁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부탁했더니 추수감사절 바로 전날, 아침 8시 일과 시작 15분 전에 잠깐 오라고 하더군요.

7시 45분에 찾아가서 과장을 만났는데, 그분이 위내시경을 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짐을 같이 옮겨 주고 계단을 같이 내려가면서 한두 마디 짧게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습니다. 인터뷰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끝나고 제가 인사하면서 그랬죠. “내년에 봅시다(I’ll see you next year!).” 그러자 과장이 “7월(트레이닝 시작)에 보자는 말이냐?”고 묻길래, 아주 자신 있게 “예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과장도 흔쾌히 그때 보자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기적이 일어난 거죠.

미국은 컴퓨터 매칭 시스템입니다. 지원자는 가고 싶은 병원 순위를 넣고, 병원은 뽑고 싶은 사람 순위를 넣어서 컴퓨터가 서로 높은 순위끼리 연결해 주는 구조죠. 저는 시라큐스 정신과가 거의 될 줄 알았는데, 세인트루이스 내과 과장이 저를 좋게 보고 순위를 높게 써 준 덕분에 그 짧은 15분의 만남으로 내과 의사의 길이 열린 겁니다.

8시간의 완벽한 인터뷰가 있었고, 15분의 즉흥적인 만남이 있었다. 그의 인생을 결정한 것은 후자였다. 계단을 내려가며 짐을 옮겨 주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과장이 본 것은 경력서가 아니라 “내년에 봅시다”라고 먼저 말할 수 있는 담대함. 이 사람의 기세였을 것이다.


‘No’라는 옵션은 없다

내과에 들어간 그는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병과 마주하게 된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을 공포에 빠뜨린 새로운 질병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 그의 인생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강창석: 내과 1년 차 때는 영어를 잘 못해서 고생했지만 2년 차를 지나면서 트레이닝을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에이즈가 막 나왔을 때였어요. 86년, 87년도인데 제가 에이즈에 꽂혀서 UCLA 전염병 분과를 지원하기도 했죠. 당시 세인트루이스 전체 에이즈 환자가 100명이 안 될 때 제가 한 30~40명을 봤습니다. 에이즈 환자를 굉장히 많이 본 사람 중 하나예요. 그래서 내과 전염병 전문의 과정을 신청해 놓고 1년 쉬면서 응급실에서 돈을 벌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기자: 결혼은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

강창석: 저는 세인트루이스에 있었는데, 제 친구의 와이프와 아내가 뉴욕 순복음교회 성가대 친구였어요. 그래서 소개를 받았죠. 몇 번 만나다가 이 여자다 싶어서 카드에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Will you marry me?”라고 쓰고 옵션을 다섯 개 줬어요. 1번 “Yes”, 2번 “Yes yes”, 3번 “Yes yes yes”, 4번 “Yes yes yes yes”, 5번은 “All of the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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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87년 10월 10일에 결혼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의사랑 결혼하려면 아파트 열쇠를 몇 개 가지고 오느니 하던 때였는데, 저는 그런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어요. 늘 그랬듯 복잡하게 생각 안 하고, ‘이 여자하고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서 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얻기 위한 프로포즈에 ‘No’라는 옵션은 아예 없었다. 이거다 싶으면 여러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결정하는 그의 성격과 직관은 신붓감을 고르는 순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 번 찾아온 사람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인연일 때가 있다.

기자: 결혼도 하셨겠다, 이제 내과 전공의로 잘 정착하셨겠네요?

강창석: 그런데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대학 동기 중에 가장 친하게 지냈던 준수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E 병원을 세운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본과 1학년 때 제주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준수 어머니가 완전히 실성하셨는데, 제가 그분에게 아들 같은 존재가 됐어요.

그분이 제 대학 시절 매년 차를 타고 오셔서 4년 내내 등록금을 주고 가셨습니다. 국립대학이라 등록금이 5만~6만 원 할 때였는데 꼭 10만 원씩 주셨어요. 정말 신세 많이 졌고 감사했죠.

그런데 90년대 초에 그 집에서 노원구에 600병상 규모의 병원을 지으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거였어요. 94년도에 그 친구 동생이 세인트루이스까지 세 번을 찾아왔습니다. 마지막에는 저희 집에 와서 아내 앞에서 울면서 “형 좀 가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해 11월에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죽은 친구의 어머니가 4년간 등록금을 대주었고, 죽은 친구의 동생이 세 번 찾아와 울었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내과 의사에게 한국행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받은 은혜 앞에서 합리성을 따지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밀수꾼이 된 의사

한국행을 결정한 그는 병원이 문을 열기도 전에 미국에서부터 일을 시작했다. 300만 불짜리 장비를 깎아 사고, 수술 도구를 박스에 싸서 직접 들고 건너갔다. 문제는 세관이었다.

기자: 병원 건축과 운영에 도움을 주신 건가요?

강창석: 한국에 가기 전부터 미국에서 장비를 사는 데 제가 다 관여했어요. 300만 불짜리 장비를 사려고 뉴욕에서 70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딜러와 협상해서 180만 불에 깎아 샀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칼, 가위 같은 정교한 의료 장비들도 제가 미국에서 전부 샀어요. 그걸 박스 네다섯 개에 싸서 아시아나 퍼스트 클래스로 실어 갔습니다.

당시 김포세관장 딸이 뉴욕에서 집 얻을 때 제가 후견인을 서 준 인연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세관 청장 백으로 무사 통과할 줄 알았는데, 그분은 제가 뭘 들고 오는지 상상을 못 하셨던 거죠.

세관에 도착했더니 어떤 사람이 나와서 “강창석님이시죠?” 하더라고요. 이미 연락은 다 돼 있었으니까 짐이 나오는 곳으로 갔는데, 박스마다 ‘밀수 근절’ 딱지가 붙어 있는 겁니다. 제가 가져온 게 전부 쇳덩어리들이니까 세관 입장에서는 완전히 밀수품이었던 거죠. 노란색 X마크가 몽땅 붙어 있었어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짐을 쌓아서 나가려는데, 글쎄 저를 도와주기로 했던 그 사람이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으니 달아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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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하는 직원이 “이거 밀수네요” 하길래 제가 그랬어요. “보세요, 밀수를 이렇게 정식 통관 게이트로 밀고 들어오면서 하는 사람 봤습니까? 이건 통관이지 밀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결국 물건을 전부 압수당했어요. 빈몸으로 나오니까 세관 청장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어떻게 됐냐고 묻더라고요. 다 뺏겼다고 했죠.

기자: 청장님이 깜짝 놀라셨겠는데요.

강창석: 그제야 제가 어마어마한 물건을 갖고 온 걸 아신 거죠. 결국 나중에 청장님이 그 물건들을 다 빼서 용달차에 싣고 병원까지 직접 배달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제 이름이 최상급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는 거예요. 그 리스트에 들어가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항문까지 검사받아야 하는 리스트인데, 컴퓨터에서 제 이름을 빼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하시더라고요. 밀수꾼 소리까지 들어 가며 장비를 다 들여온 겁니다.

그렇게 수술 장비 깔고 CT, MRI 다 사서 95년 3월에 병원 문을 열었습니다.


첫 수술, 첫 사고

마침내 그랜드 오프닝. 그러나 시작은 축하가 아니라 비명이었다.

기자: 순조롭게 잘 운영되었나요?

강창석: 600병상을 시운전하고 오프닝을 했는데, 첫 번째 수술 케이스가 맹장염에 걸린 고등학생 여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사고가 났습니다. 2월 말이라 날씨가 추우니까 수술방 간호사들이 환자 아래에 히팅 패드를 깔아 준 거예요. 그런데 시작부터 끝까지 패드를 계속 켜 둔 바람에 과열이 됐습니다. 환자는 마취 상태라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수술 끝나고 보니 엉덩이에 3도 화상이 생겨 버린 겁니다. 첫 케이스부터 의료사고가 터진 거죠.

환자 가족들이 난리가 났어요. 병원장 나오라고 하고, 당시 한국은 희한한 게 무슨 당 정책위원이라면서 깡패 같은 사람들이 와서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협박을 해요. 첫 케이스부터 의료사고 소송에 휘말리면서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밀수꾼 소리를 들어 가며 장비를 들여오고, 블랙리스트까지 감수하며 병원을 열었지만 그 모든 노력의 첫 결과가 의료사고였다. 깡패 같은 사람들이 병원장실 앞에서 고성을 지르는 동안, 그는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했을 것이다.


한밤의 그림 쿠데타

의료사고의 소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또 다른 벽과 마주했다. 이번에는 수술실이 아니라 병원 로비의 벽이었다.

기자: 의료사고 이후 다른 어려움은 없었나요?

강창석: 병원을 운영하면서 알게 됐는데, 한국은 건물을 지으면 예산의 몇 퍼센트를 의무적으로 예술품에 투자해야 하는 법이 있어요. 100억짜리 건물이면 10억은 미술품을 사야 한다는 거죠.

기자: 그래서 한국의 대형 빌딩들 내부에 조각상이나 그림이 많았던 거군요.

강창석: 그렇죠. 저는 내막을 아니까, 홍대 교수님 같은 예술가 선배들을 찾아가서 좋은 작품들을 정말 싼 값에 구해 왔습니다. 몇십억짜리 가치가 있는 걸 몇억에 사 온 거죠. 그런데 주인들은 비싼 그림은 집에 모셔 두고 적당한 가격의 그림을 걸고 싶어 하셨어요. 이해는 가지요. 하지만 저는 환자들이 이 아름다운 그림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식하게 사고를 쳤죠.

기자: 어떤 사고를 치신 건가요?

강창석: 한국은 병원에 못 하나 박을 때도 회장님 사모님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어느 날 밤에 아는 교수하고 같이 그 값비싼 작품들을 병원 로비랑 2층, 3층에 제 마음대로 다 붙여 버렸습니다. 다음 날 사모님이 보시고는 “쿠데타도 이런 쿠데타가 없다”며 한바탕 소동이 났죠.

제가 그런 난리를 피우며 느낀 게, 한국은 회장님이 “죽어”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하는 통제 시스템이라는 거였어요. “아, 여기는 내가 살 곳이 아니구나” 하는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오프닝까지는 해 줬지만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대통령이라도 못 바꿀 시스템

한밤의 쿠데타로 그림은 걸었지만, 그가 진짜 바꾸고 싶었던 것은 벽이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기자: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힘드셨군요.

강창석: 저는 병원에서 매년 전시회도 열고 작품도 바꾸는 그런 아름다운 병원을 꿈꿨는데 현실은 달랐죠. 한국 의료 시스템도 다 바꿔 버리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주변에서 “당신이 보사부 장관이라도 해야겠구만”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이라 해도 이 시스템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고요.

기자: 당시 의료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나요?

강창석: 정부가 의료 수가의 모든 부담을 의사에게 전가하고 돈을 안 쓰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니 의사는 살아남으려고 원가 계산에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죠. 94년 당시 화장실 물 한 번 내리는 원가가 24전인가 그랬는데, 한 사람당 물값이 얼마 나갈지까지 계산하며 원가를 따졌어요. 화장실 전등 센서도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기값 아끼려고 만든 거였죠. 심지어 아프지 않은 플라스틱 바늘을 쓰고 싶어도 의료 수가가 안 맞아서 못 썼습니다. 환자가 원하면 밖에서 직접 사 오라고 해야 할 정도였어요.

결국 죽으라면 다 죽는 시늉을 하는 게 한국이니까, 그런 사람이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병원 측에 말하고 다시 미국으로 왔습니다. 도움은 충분히 드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환자를 위해 플라스틱 바늘 하나 쓸 수 없는 시스템. 그가 꿈꾼 병원은 매년 그림이 바뀌고 환자가 아름다움 속에서 치유되는 곳이었지만, 현실의 병원은 화장실 물 24전을 아끼는 곳이었다.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도 바꿀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그렇게 그는 다시 바다를 건넜다.


세 개의 삶을 동시에 살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아무런 플랜이 없었다. 하지만 플랜이 없는 사람에게도 인연은 찾아온다.

기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실 때 어떤 계획이 있으셨나요?

강창석: 95년, 96년쯤 돌아왔는데 원래 한국에 살기로 하고 갔던 거라 아무런 플랜이 없었어요. 그러다 한국의 큰 재벌 회장님이 저를 좋게 보셔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분이 다발성 골수암으로 투병 중이셨는데, 제가 메디컬 쪽을 연결해 드리면서 인연이 됐거든요. 그분이 제약회사 배경이 있으니 미국에 있는 제약 벤처들에 투자해서 키우는 홀딩 컴퍼니를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세우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기자: 의사 일을 하시면서 사업도 같이 하신 건가요?

강창석: 네, 당시 저는 병원에서 한 주 일하고 한 주 쉬는 시스템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연한 시간을 활용해 투자를 관리하고 홀딩 컴퍼니 일을 보면서 동시에 워싱턴 대학교에서 MBA를 시작했습니다.

기자: 의사 업무에 사업, 거기다 MBA까지. 공부하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강창석: 2년 동안 방학도 없이 정말 치열하게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공부하고, 오피스에 가서 일하다가 오후 6시부터 밤 12시까지 다시 MBA 공부와 숙제를 했어요. 금요일과 토요일은 학교에 가서 온종일 수업을 들어야 페이퍼를 내고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죠. 그렇게 2년을 버텼습니다.


벤처의 꿈, 두 번의 좌절

운명은 또다시 예상치 못한 카드를 내밀었다. 한 장이 아니라 두 장, 연달아.

기자: 어바인에 세운 벤처 사업은 어땠어요?

강창석: 어바인으로 이사 가서 총영사까지 불러 거창하게 오프닝 세레머니를 다 마쳤죠. 그런데 딱 3개월 만에 그 회장님이 돌아가셨어요. 회장님이 돌아가시니 벤처의 취지나 모든 게 하루아침에 무너지더군요. 저는 돈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바로 팩스로 사표를 내고, 제가 팔았던 집을 어떻게든 다시 찾아서 짐을 싸 들고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습니다. 9월 28일에 돌아왔는데, 제가 ‘9.28 수복’이라고 불러요.

기자: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오신 후에는 조용히 지내셨나요?

강창석: 그러려 했는데 제 소문을 듣고 누군가 또 찾아왔어요. 이번에는 IT 벤처였습니다. 전자공학 석사 엔지니어 38명을 거느리고 인터넷 라우터를 개발하는 회사를 맡았죠. 회사를 키워서 15억 달러, 한화로 약 2조 원 정도에 팔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2001년이었어요. 6개월만 더 있었으면 됐는데, 그때 9·11 테러가 터졌습니다. 모든 투자가 끊기고 한순간에 다 날아갔지요.

3개월 만에 무너진 첫 번째 벤처. 6개월만 버텼으면 성사됐을 두 번째 벤처. 한 번은 한 사람의 죽음이, 한 번은 세계를 뒤흔든 테러가 그의 손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역사의 날짜들이 그의 인생에 흉터처럼 새겨졌다.


“그래, 이거지”

2조 원이 사라진 뒤, 그의 몸이 먼저 무너졌다. 하지만 무너진 자리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소명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기자: 연이은 사업 실패로 충격이 정말 크셨을 것 같습니다.

강창석: 너무 충격을 받아서 몸무게가 급격히 줄고, 바지 사이즈가 34에서 30까지 줄 정도로 몸이 망가졌어요. 그러다 멕시코 의료 선교를 가게 됐는데, 도착한 날 밤에 환자를 보면서 제 마음속에 강력한 울림이 왔습니다. “그래 이거지(This is it.)”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선교가 바로 이거라는 걸 깨달았죠.

그때부터 선교를 통해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꼬였던 사연들이 선교를 통해 풀려나가는 걸 느꼈고, 그게 제 영혼의 살길이 되었기에 25년째 매년 선교를 가고 있습니다.

모든 실마리가 멕시코의 어느 밤, 환자 앞에서 하나로 모였다. 좇던 것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또렷해졌다.


“이건 아니다”

벤처의 실패를 딛고 선교에서 소명을 되찾았지만, 사업의 기회는 계속 그를 찾아왔다. 중국, 샌프란시스코, 서울. 무대는 바뀌었지만 질문은 같았다. 이것이 내 길인가.

기자: 이후에도 사업 기회가 있으셨나요?

강창석: 중국 상해에 검진 센터나 진단 센터를 차리려고 MBA 인맥들을 통해 많이 알아봤어요. 그런데 걔네들은 끝끝내 땅이나 운영권의 과반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달러 현금이 들어오는 것만 원했죠. 저는 그때 이미 통찰했습니다. “이건 네 땅이 아닌데 방 빼라고 하면 어떡할 거냐”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 보세요, 많은 인터넷 회사들이 돈을 넣었지만 결국 다 쫓겨나고 있잖아요.

기자: 마지막으로 하셨던 사업은 무엇이었나요?

ZAP 전기차 회사 CEO 당시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강창석: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온 ‘ZAP’이라는 제로 에어 폴루션 전기차 회사의 CEO를 맡았습니다. 2009년, 2010년 당시에 테슬라와 경쟁하던 회사였는데, 제가 CEO로서 서울에서 춘천까지 왕복하는 전기차를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해서 직접 운전까지 했어요. 그러다 2010년 3월에 “이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벤처나 사업은 더 이상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죠.

2010년 8월에 아내와 함께 모든 걸 다 털고 애틀랜타로 이사 왔습니다. 모든 벤처와 사업을 내려놓고 다시 의사 본연의 길로 돌아오기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내의 한마디

기자: 애틀랜타에서의 시작은 어땠나요?

강창석: 어바인에 있을 당시 3년 동안 호스피탈리스트(입원 환자의 진료 전반을 전담하는 전문의 서비스) 회사에서 디렉터를 맡았습니다. 제 밑에 한 70~80명의 의사가 있었죠. 제 이름으로 15개 주에 라이선스를 내고 관리하는 기업적인 업무를 했습니다. 그러다 애틀랜타에서 개업을 하려고 에모리 대학의 조그만 병원의 디렉터 자리를 알아봤더니, “왜 그 큰 회사의 디렉터가 이런 조그만 자리에 오려 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냥 여기 와서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죠.

기자: 개업하실 때는 우여곡절이 없으셨어요?

강창석: 사실 다른 곳에 봐 둔 자리가 있어서 거기다가 개업하려고 했었어요. 3층 기준으로 설계도 다 하고 파이널 컨트랙트만 남겨 둔 상태였는데, 갑자기 주인이 3층 말고 1층으로 가라는 겁니다. 제가 다 결정해서 설계까지 끝냈는데 황당했죠. 그래서 못하겠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야, 여기 와서 또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싶어 기분이 참 그랬는데, 마침 우리 집 근처에 오픈 스페이스가 있나 보러 갔다가 부동산에서 지금 이 존스크릭 자리를 소개받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게 더 좋은 곳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어요.

기자: 사모님께서도 원장님의 이런 변화를 많이 지지해 주셨겠네요.

강창석: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만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던 사람이 없는데, 이제 의사로 사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원하셨던 길인 것 같다”고요. 어머니의 기도도 그렇고, 제가 겪은 수많은 기회 중에서도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던 건 내과 의사의 길이었다는 걸 저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애틀랜타에 온 겁니다. 개업 후 지금까지 선교는 선교대로 하면서 환자 보는 일에만 매진하며 살았어요.

벤처 사업가, CEO, MBA 졸업생, 디렉터. 이력서에 적힌 수많은 타이틀을 거쳐 그가 마지막으로 받아들인 이름은 처음과 같았다. 의사.


호마, 다음 세대를 위한 길

기자: 선교 단체 ‘호마(HOMA)’를 만드신 것도 소명의 연장선인가요?

강창석: 2019년에 호마(HOMA, HealthOne Medical Association)라는 선교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저희 병원에서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의대에 보내는 멘토링을 계속해 왔는데, 제 수제자 중 한 명은 2년 뒤면 이 병원으로 돌아와 선교를 함께할 것 같아 아주 뿌듯합니다.

HOMA 선교 단체와 과테말라 클리닉 직원들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제 목표는 현지 사람들이 스스로 진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겁니다. 1년에 한 번 가서 도와주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과테말라는 작년에 클리닉을 완성해서 이제 의사가 한 달에 서너 번씩 진료하는 시스템이 됐습니다. 케냐는 재작년에 매물로 나온 옛날 초등학교 자리를 사서 작년에 클리닉으로 개조해 오픈했어요. 제가 직접 학비와 생활비를 대서 간호학교에 보냈던 현지 목회자가 졸업 후 돌아와서 지금 매일 상설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HOMA 선교 단체가 케냐 클리닉에서 의료 선교를 펼치고 있다.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기자: 운영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환자들은 얼마나 오나요?

강창석: 케냐 클리닉은 한 달 유지비가 천 불 정도 드는데, 현재는 예산 문제로 일주일에 이틀만 엽니다. 한 번 열면 주민들이 새벽 4~5시부터 장사진을 쳐요. 하루에 200~300명 정도가 오는데 저희 인력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라 끊고 있습니다. 약값이 없어서 못 고치던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고 있죠. 그래서 지난달에 방문해서 클리닉 옆에 있는 2에이커 땅을 추가로 더 샀습니다. 거기에 예배당도 짓고 선교 센터를 더 확장할 계획입니다.

클리닉에 몰려든 주민들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케냐에서 외친 “심봤다!”

20년간 물이 없던 땅에서 샘물이 터졌다. 기적이라 부르기엔 너무 실용적이고, 우연이라 부르기엔 너무 절실했던 발견이었다.

기자: 케냐 선교지에서 ‘물’을 발견하셨다고요?

강창석: 네. 2023년 선교지 근처에서 제가 샘물을 발견했어요. 물 전문가를 데려갔더니 그분이 보시고는 “장로님, 이건 심봤다입니다!” 하며 대단한 선물이라고 놀라더군요. 보통은 구멍을 깊게 박아야 하는데, 이건 웅덩이만 파면 물이 계속 차올라요. 전체 도시 주민이 다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양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신 마르지 않는 샘물이죠.

케냐 선교지에서 샘물을 발견한 강창석 장로와 물한모금 선교회 권종승 선교사(왼편)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작년에 이 샘물을 개발해서 무베레 지역 우물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무거운 물통을 들고 온종일 물 길러 다니는 게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멀리 가지 않아도 되니 모두 함박웃음을 짓더라고요…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던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일었습니다. 사실 저는 뒷그림만 그린 평범한 조력자일 뿐, 물 사역하시는 권종승 선교사님과 김요한 현지 선교사님의 노고가 제일 크십니다. 물 사역 후원하시는 우리 아틀란타 연합교회 모든 분들도요.

선교지 예배당에서 물을 구하는 기도 중인 권종승 선교사와 강창석 장로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하루에 12시간 걸려 물 한 동이 길어오는 주민들이 안타까워 밤새 달려 도착한 극한 오지 작은 예배당에서 드렸던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놀랍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샘물에서 끌어올린 물을 공급받아 즐거워하고 있다.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Healing One at a Time. 한 사람씩 고치겠다던 모토가 이제는 한 마을씩 살리는 일이 되었다. 웅덩이만 파면 차오르는 물. 그것은 물 한 동이를 길으러 몇 시간씩 걸어야 했던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영과 육을 고치는 의사가 되게 해 달라던 어머니의 기도는 반세기를 지나 아프리카의 마른 땅에서 샘물이 되어 솟아올랐다.


3,000석 예배당과 10만 불의 지붕

그의 눈은 다음 단계를 향했다. 몸을 고치는 일 옆에 영혼을 돌보는 자리가 필요했다.

기자: 예배당도 크게 지으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강창석: 클리닉 옆에 산 땅이 생각보다 훨씬 넓더라고요. 저랑 같이 사역하는 김요한 현지 선교사님이 그 땅을 보더니 3,000석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고 싶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사실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도 700석인데 케냐에 3,000석을 짓는다고 하니 다들 놀랐죠. 하지만 마을 주민들을 다 전도해서 모으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고 제가 딱 선포해 버렸습니다.

케냐 선교지 클리닉 현장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기자: 규모가 크면 건축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강창석: 처음에는 지붕 덮는 데만 50~60만 불이 들 거라고 해서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밤새 고민하더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가져왔어요. 50m짜리 큰 지붕 하나를 올리는 대신, 스테이지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소강당 세 개를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기성품 커머셜 지붕을 쓸 수 있어서 아주 싸지거든요. 50만 불 들 일을 단 10만 불로 해결할 수 있게 된 거죠. 중앙에는 나무와 꽃을 심어 오픈 스페이스로 만들면 정말 아름다울 겁니다. 내년에 가서 테이프 커팅을 할 꿈을 꾸고 있습니다.

3,000석 예배당을 짓자는 선교사의 말에 “그러자”고 답한 순간은 배짱이나 기세가 아니었다. 믿음이었다. 마른 땅에서 샘물이 터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사람에게 3,000석은 숫자가 아니라 약속이었다.


노벨상 후보급 천재가 찾아온 날

25년간 선교로 영혼을 돌보고, 내과 의사로 몸을 고쳐 온 그에게 새로운 영역이 열리고 있다. 이번에는 뇌다.

기자: 최근에는 뇌과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셨다고요.

강창석: 스탠퍼드 대학의 이진형 교수라고, 서울대 공대 출신의 천재적인 뇌과학자를 만났습니다.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걸 계기로 뇌 신경 연구에 뛰어든 분인데, 뇌의 전기 신호를 매핑해서 파킨슨, 치매, 우울증, PTSD 같은 모든 뇌 질환을 알고리즘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기술을 개발했어요. 미국 국립보건원(NIH) 이노베이션 어워드도 받고, 40세 전에 스탠퍼드 종신교수가 된 노벨상 후보급인 한국의 국보입니다.

기자: 그 대단한 분이 원장님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가요?

강창석: 제 환자 중에 말기 위암으로 고생하던 서울대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을 도울 방법을 찾다가 이 교수와 연결이 됐습니다. 마침 이 교수 팀이 작년 12월에 컨퍼런스 차 애틀랜타에 왔을 때 우리 오피스에서 만났죠. 그 일을 계기로 미국 내 1호 뇌 진단 센터를 우리 병원에 열기로 했습니다.

이진형 교수의 뇌 매핑 기술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

노벨상 후보급 과학자와 손을 잡았고 기술은 확보됐다. 남은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돈이었다.

기자: 이런 최첨단 센터를 건립하려면 자본이 엄청나게 필요할 텐데, 자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강창석: 처음에는 이 어마어마한 돈을 언제 벌어서 갚을지 걱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의 비전이 너무 좋으니까 헤지펀드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이건 의료이고 공익을 위한 일이다. 환자들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 혜택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더니, 그쪽에서 그랜트 형식의 적극적인 펀딩을 제안해 주었습니다. 현재도 계속 논의 중인데 처음 제안이 왔을 때 정말 믿기지가 않았죠.

제가 94년 한국에 갈 때부터 가장 먼저 냈던 아이디어가 검진센터였고, 그게 제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진형 교수의 뇌 매핑 기술이 합쳐지면서 ‘뇌와 몸’을 하나로 묶어 검진하고 고치는 센터가 현실화되고 있는 겁니다. 영과 육을 함께 고치는 센터를 짓는 제 꿈이 드디어 이루어져 가고 있어요.

기자: 이진형 교수님이 원장님을 각별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강창석: 2주 전 스탠퍼드 대학에 다녀왔습니다.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세계적인 인물들이 발표했던 아주 상징적인 장소에서 이진형 교수가 미국 국방부 관계자들을 모시고 컨퍼런스를 연 겁니다. 그런데 원래 계획에는 없었는데, 마지막 클로징 때 이 교수가 저보고 한 말씀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미국 군인들의 60~70%가 PTSD 같은 멘탈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데, 이진형 교수의 기술은 국방부에서도 엄청나게 관심을 가질 만큼 어메이징한 프로덕트라고 강조했죠.

이 친구가 저를 참 잘 본 것 같아요. 아침을 같이 먹으면서 저보고 “선생님은 저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두 번째 멘토”라고 하더라고요. 고맙지요.

스탠퍼드 대학교 이진형 교수와 강창석 원장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을 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다. 뒤를 돌아볼 때만 비로소 연결된다.” 유신 시대의 철창, 300장의 지원서, 15분의 인터뷰, 멕시코의 밤, 케냐의 샘물. 그때는 각각 따로 놓인 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뒤를 돌아보면 모든 점이 하나의 선 위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의료는 소명

기술이 확보되고 자본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기자: 원장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의료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강창석: 미국의 의료는 지금 완전히 돈이 모든 걸 결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배운 것은 의사는 소명이고 의료는 공익이라는 점입니다. 이 근본 뿌리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해도 다 덧없는 거죠. 저는 진단 센터를 지으면서 끝내 이 공익의 마음을 잃지 않고 싶습니다. 

기자: 진단 센터의 구체적인 운영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강창석: 제대로 된 진단 센터라면 머리만 찍는 게 아니라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CT, MRI가 다 있어야 합니다. 운영비가 엄청나지만, 그랜트 덕분에 운영이 가능해졌으니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검진 가격으로 환자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벤처를 세우고 무너뜨리며 쌓았던 경영 감각,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버텨 낸 MBA, 300만 불을 180만 불로 깎던 협상력. 당시에는 실패한 우회로처럼 보였던 모든 경험이 마치 이때를 위한 준비였던 것처럼, 지금 그의 손안에서 하나로 맞물리기 시작했다.


One Day at a Time

기자: 원장님이 꿈꾸시는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강창석: 제 꿈은 미국에 20개의 브랜치를 열고, 해외 선교지에 5개의 브랜치를 여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최고 퀄리티의 센터를 세워서 우리 직원들이 미국과 선교지를 로테이션하며 일하게 하고 싶어요. 이번 달은 케냐에서, 다음 달은 과테말라에서 일하는 식이죠. 저는 그들에게 미국 급여를 그대로 줄 겁니다. 

이제 ‘선교’라는 말을 따로 쓸 필요도 없어요. 이 사역 자체가 곧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환자를 보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게 꿈입니다. 5월이면 일흔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70세부터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니 인생은 70부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강창석 원장이 의료 선교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Photo courtesy of Dr. Christopher Kang, MD)

저는 인생을 “한 번에 하루씩(One Day at a Time)” 산다고 믿습니다. 오늘이 전부고 내일은 없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하루살이 인생일 뿐입니다. 10년을 한꺼번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 겸손해야 하고 자랑할 것도 없어요. 오늘 하루 벌어진 일들을 감사히 정리하고, 내일 눈을 뜨면 또 그 연장선에서 살다가,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는 거죠. 그게 전부입니다.

어머니가 기도했던 ‘영과 육을 고치는 의사’. 슈바이처를 멘토로 삼았던 소년. 투르니에의 전인 치료를 신봉했던 의대생은 이제 하루살이 인생이 그저 감사한 의사가 됐다. 70대에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는 그는 오늘도 자신의 두 발이 닿는 땅마다 물길을 내며 사람을 살린다. Healing One at a Time. 한 사람씩, 서두르지 않고, 온전히.

글. 이승은 (Eunice Lee) / InnerView. No.12 2026년 4월 15일


강창석 (Christopher Kang, MD)

서울 출생. 경복중·고등학교를 거쳐 197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 1980년 졸업. 1981년 도미. 뉴욕 메디컬 칼리지 외과 레지던트를 거쳐 워싱턴 대학교 부속 세인트루크 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 과정 수료, 세인트루이스 지역에서 입원 환자 관리 전문 기업 IMI의 메디컬 디렉터를 역임했다.

2010년 애틀랜타로 이주. 디캡 메디컬 힐랜데일 병원 하스피탈리스트 그룹 치프를 거쳐 헬스원케어 메디컬 센터(Health1Care Medical Center)를 존스크릭에 개원·운영 중이다.

2019년 의료 선교 단체 호마(HOMA, HealthOne Medical Association)를 설립. 매년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의료 취약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과테말라와 케냐에 상설 클리닉을 개설해 현지 자립 진료 시스템을 구축했다.

최근 스탠퍼드 대학교 이진형 교수와 협력하여 뇌 전기 신호 매핑 기술을 활용한 미국 내 1호 뇌 진단센터 및 종합 검진센터를 애틀랜타에 설립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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