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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불 사나이의 진짜 이야기

보이는 것 너머

사람은 저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고, 품고 있는 철학과 소신도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삶의 이야기는 독특하고 특별하며 소중하다. 누군가의 현재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여정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너뷰가 사람을 대하는 시각이다.

강신범. 사람들은 그를 WNB 팩토리의 대표로,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리더로 안다. 그러나 그 이름 뒤에는 열일곱 살에 홀로 여동생들을 건사하며 세상과 맞섰던 소년이 있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가족을 향한 온기를 품고, 자기 방식대로 살되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아버지는 목사였고, 나는 혼자였다

기자: 어떻게 자라셨어요?

저는 원주에서 태어나 주로 서울에서 자랐어요. 아버지가 선생님을 하시다가 목회를 하시게 되면서 발령날 때마다 따라다녀야 했지요. 연희, 이태원, 평택. 초등학교만 세 군데를 다녔어요. 사춘기 때 친구만 사귈 만하면 이사를 가야 했죠.

아버지가 좀 독특한 분이셨어요. 서울대 미대에 들어가셨다가 수학과로 졸업하셔서 수학 선생님을 하셨어요. 그러다 신학교에 가시더니 목회자의 길을 가셨지요. 우리 집안이 대대로 기독교 집안인데 목사만 15명이 넘어요. 찬송가 작사가로 이름이 올라 있는 분도 계세요. 이런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근데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셨어요. 결혼식 사진을 보면 성당에서 외국인 신부가 주례를 섰어요. 당연히 할아버지 쪽 집안은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어머니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를 잃은 것만 해도 충격이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9월에 아버지가 미국으로 목회 초빙을 받아 떠나셨어요. 여동생들이랑 저만 남겨두고요.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신도 아내 잃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사로서 부르심을 받아 가셨을 거라고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돈 한 푼 남겨두지 않고 가셔서 연락도 없으신 아버지가 많이 원망스러웠죠.

그때부터 여동생들을 챙기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일하고 공부하며, 어떻게든 버텨야 했어요. 그 시절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지 지금도 새벽에 눈 뜨면 몸이 먼저 움직여요. 쉬면 불안한 사람이 된 게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남겨진 소년, 스스로 어른이 되다

기자: 지난해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마음이 어떠셨어요?

장례식장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셨다고요. 자기 자식들은 버려두고 평생 다른 양들을 돌보셨으니 목사님으로서는 훌륭하신 분이라고요. 근데 제 아버지로서는 빵점이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고민을 많이 해요. 사람들은 몇 시간씩 운전하는 걸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혼자 멀리 운전해 가는 시간이 오히려 소중합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됐거든요. 엄마도 없고, 아버지도 떠나고, 혼자 남겨진 내가 여동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런지 저를 무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좀 세게 대하는 편이에요.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대학교 1학년 중퇴라서 학력도 없는 내가 여동생들을 보호하면서 살다 보니 생긴 대응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못 살았을 거예요. 지금도 그 반응이 가끔 나오는데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이기도 하니까요.

강신범 대표와 가족들 (Photo courtesy of Shinbeom Kang)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마저 떠난 자리에서 열일곱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야 했다. ‘시절 위로’라는 게 있다. 그때 받지 못하면 평생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감정의 구멍. 그는 부모의 부재가 남긴 그 구멍에 ‘책임감’이라는 말을 꽉 틀어박고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장례식장에서 꺼낸 그 말 한마디는 수십 년을 품어 온 문장이었을 것이다.


“나는 신앙을 버린 게 아니다”

기자: 음악에 재능이 많으시다고 들었어요. 언제 배우셨어요?

배운 게 아니라 시킨 거예요. 목사 아들이니까 피아노 치고, 기타 치고, 음향 기기 만지고.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 음향을 만졌으니 자연스럽게 전문가가 됐어요. 억지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찬양 인도( (Photo courtesy of Shinbeom Kang))

예수전도단 화요 모임 초창기에 함께했었죠. 미국에 와서는 오랫동안 찬양을 안 했는데 어느 날 교회 찬양팀을 보니까 너무 엉성한 거예요. 그때 달란트 비유가 딱 떠올랐습니다. 받은 걸 묻어두는 사람이 제일 나쁜 사람이라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했죠. 그 뒤로 워십 댄스팀도 최초로 만들고, 애틀랜타 일대에서 찬양 집회도 많이 이끌었어요.

기자: 요즘은 교회를 좀 쉬고 계신다고요?

대대로 기독교 집안에 살면서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 낮과 저녁 예배, 새벽기도까지. 일주일에 열 번 넘게 예배를 드린 적도 있어요. 여행을 가도 출장을 가도 근처 교회를 꼭 찾아갔어요.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근데 어느 순간 보니 대형 교회들이 세습을 하더라고요. 교회법으로 안 되니까 편법을 쓰고. 장로들이 돈을 해먹고. 그걸 보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졌어요.

미국에 살고, 집 있고, 차 있고, 밥 먹으면 지구상 상위 5%에 든다고 합니다. 여기 사는 한인들 상당수는 심지어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차를 소유하고 더 좋은 걸 먹어요. 그러면 5%가 아니라 3%에 해당되지 않나요? 그런데도 교회 가서 또 뭔가를 달라고 기도하는 게 맞는 건가 싶어요. 잘 살고 있으면 ‘감사합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교회를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신앙을 버린 게 절대 아닙니다. 교회 생활에 회의감을 느낀 거죠. 

55년 넘도록 교회 안에서 살아온 사람의 말 속에는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모든 크리스천에게는 저마다의 ‘천로역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밖에 있어야 안이 보이고, 벗어나야 비로소 그 길에 온전히 이를 수 있는 것처럼.


300불로 시작해 100시간을 살다

1987년 7월, 군대를 막 제대한 스물세 살 청년이 애틀랜타 공항에 내렸다. 한국의 여름도 뜨겁지만, 그해 그가 처음 마주한 미국 남부의 공기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열기였다. 손에 쥔 것은 아버지를 통해 받은 가족 영주권뿐. 가진 것이 많아서 미국에 온 사람이 아니라, 이제부터 살아내야 했기에 미국에 온 사람이었다. 

군복무 당시 (Photo courtesy of Shinbeom Kang)

기자: 미국에서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300불 들고 시작했어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처음에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적응했어요. 숙소에서 먹고 자고 일하면서. 그러다 일본식 퓨전 식당 도쿄샤피로에서 경력을 쌓았죠. 2년 뒤에는 그 식당을 오너 파이낸스로 인수했어요. 스물다섯이었습니다.

한 가지만 생각했어요. ‘남들이 40시간 일할 때 나는 100시간을 움직이면 두 배 이상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당연한 거잖아요. 새벽 2시까지 바깥에서 사람 만나고 움직이는 사람이랑, 5시 퇴근해서 집에서 TV 보는 사람이랑 어떻게 같은 결과가 나옵니까.

저는 골프도 안 치고, TV도 안 봐요. 낮잠을 한 번도 자 본 적이 없어요. 평균 6시간 자고, 18시간을 움직여요. 옷도 20년째 청바지에 검은 유니폼이에요. 스티브 잡스가 왜 맨날 같은 옷 입고 다녔는지 알잖아요. 그 30분도 아까운 거예요.

다만 유튜브는 종종 봐요. 요리하는 거,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 등 배울 것들이 있는 콘텐츠만 골라서 공부합니다. 그렇게 노력하기 때문에 좋은 대학 나오고 저보다 똑똑하고 영어 잘하는 사람들 데리고 제가 일할 수 있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 깊이 있게 공부는 못해도 폭넓고 다양한 공부는 계속 해야 합니다.

첫 번째 전환점은 스물다섯에 찾아왔다. 자신을 고용했던 한인 업주로부터 오너 파이낸스를 받아 식당을 인수했다. 식당 창업이 무엇인지도, 사업이 어디서부터 어려워지는지도 모른 채 시작했지만, 그는 주방에서 배우고 손님 앞에서 배웠다. 실패할 것 같았던 시간들 속에서 조금씩 자기만의 감각을 쌓아갔다.


음식 말고 경험을 팔아야

이민 초기의 삶은 대개 거창하지 않다. 그의 시작도 그랬다. 혼자 와서 먹고 자고 일하는, 말 그대로 매일을 버텨내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자기 길을 본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번쩍이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여정을 성실히 건너는 사람에게 천천히 찾아오는 종류의 것이었다.

WNB 팩토리 푸드 트럭(Photo: Atlanta K Media)

기자: WNB 팩토리 창업 이야기 들려주세요.

식당을 여러 번 해 보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맛있는 음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예요. 고객이 그 식당에서 느끼는 모든 경험이 중요해요. 음식 맛, 서비스, 분위기. 그 균형이 맞아야 손님이 다시 와요.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고객이 불편하면 다시 오지 않아요. 그 당연한 걸 직접 부딪히면서 배웠어요.

그 철학을 갖고 2015년에 트로이 표 대표와 함께 WNB 팩토리를 창립했습니다. 저한테 없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지요.

왼쪽부터 트로이 표 공동대표와 정지선 셰프, 강신범 공동대표(Photo:Atlanta K Media)

단순히 치킨이랑 버거를 파는 게 아닙니다. 한국적인 맛과 문화를 미국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거예요. 고객이 기대하지 않았던 경험을 주는 것, 그게 우리 브랜드의 핵심이에요.

백종원 씨를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요리사와 사업가는 달라요. 요리만 잘한다고 해서 식당이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요리사가 아니라 사업가로서 접근해요. 맥도날드, 버거킹의 역사와 시스템을 공부하고, 프랜차이즈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가맹점이 잘되면 나도 잘 되는 거예요. 그게 제 철학이에요. 가맹점주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데 아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단기적인 수익보다 함께 지속 가능하게 성장하는 게 목표니까요.

그의 사업 이야기는 ‘무엇이 다시 손님을 오게 만드는가’를 오랫동안 관찰한 기록에 가깝다. 강 대표는 고객의 기대를 충족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기대를 넘어서는 순간에 비즈니스의 승부가 갈린다고 믿게 됐다. 이 지점에서 그의 사업 철학은 매출의 언어를 넘어섰다.


기자: 지금은 어디까지 오셨어요? 다음 목표는요?

2015년 애틀랜타에서 시작한 작은 매장이 지금은 미국 12개 주에 150여 개 매장이 됐어요. 시스코, 코카콜라, 우버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스폰서로 참여할 만큼 브랜드 위상도 달라졌고요. 한인 프랜차이즈 최초로 25개 주 이상에서 지점을 운영하는 내셔널 프랜차이즈가 되는 게 현재 목표예요. 그 다음은 글로벌이고요.

애틀랜타 메르세데스-벤츠 스타디움에 한인 업체 최초로 입성한 WNB 팩토리(Photo:Atlanta K Media)

커피와 와인 사업도 준비하고 있어요. 음식과 결합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키우고 싶어요. 세상은 유행을 타지 않는 것들이 결국 오래 가거든요.

흔히 세상은 5%가 나머지 95%를 이끌어 간다고 하죠.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예요. 5%로 살 거냐, 95%로 살 거냐. 이건 선택이에요. 저는 처음부터 그 5% 안에 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업가에게는 흔히 숫자가 따라붙는다. 몇 개 주, 몇 개 매장, 몇 년 성장. 그러나 그가 정말로 세우고 싶었던 것은 매장 수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단기적인 흥행을 넘어 오래 살아남는 브랜드, 음식 사업을 넘어 라이프스타일로 확장 가능한 브랜드, 혼자 잘되는 회사가 아니라 함께 성공하는 시스템. 그의 말 속에는 늘 다음 10년이 들어 있다. 


이 부부가 사는 법

그는 자신의 성공에 별다른 비결이 없다고 했다. 선택과 집중.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또 하나. 남 모르는 아내의 헌신과 내조였다.

기자: 어떤 남편이세요?

미국에 온 그해 11월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돌아와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했어요. 식당에서 일한 지 1년 후에 중고차를 구입하고, 여동생들을 데려와 함께 살면서 자리를 잡아갔죠.

그 시절 제가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동안 아내가 동생들 챙기고 자녀 둘을 다 키웠어요. 처음에는 아내도 왜 이렇게 늦냐고, 일찍 들어오라고 했죠. 그럴 때마다 밖에서 사람 만나고 인맥 쌓는 게 술 먹고 노는 게 아니라는 걸 설명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요령껏 얘기는 못 했겠지만요.

22살 청년 강신범과 당시 연인이었던 아내(왼쪽), 큰 여동생(오른쪽)
(Photo courtesy of Shinbeom Kang)

지금은 아내가 잔소리를 안 해요. 오히려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받는다고 해요. 남편이 아직까지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어오고, 집에서 밥 달라는 소리도 안 하고, 심지어 요리까지 직접 해서 갖다 준다고요.

긴 세월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켜준 아내예요. 제 나이 스물두 살 때 네 살 연상인 아내를 만나 집안 반대 속에서 영화 같은 연애를 했었지요. 그 얘기하려면 또 책 한 권입니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성공한 사업가. 이 셋을 동시에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제가 선택한 건 먼저 사업가가 되는 거였어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나머지는 나중에 가능해지거든요.

일찍 들어가서 애들이랑 30분 놀아 주고 잔소리 1시간 하는 것보다, 어쩌다 한 번 만나서 반갑고 친근한 게 낫지 않나요. 24시간 붙어 있으면 싸우는 거예요. 저는 아내와 평생 거의 싸운 적이 없어요. 얼굴을 봐야 싸우지, 얼굴을 안 보여 주는 거예요. 애들도 교회에서 한 번 마주쳐야 반갑죠. 농담 같지만 진심이에요.

상대를 놓아준다는 것은 관계를 끊는 게 아니라, 사랑 속에서 상대의 독립을 허용하는 힘이다. 그는 일찍이 이 지혜를 깨닫고 아내이든 자녀이든,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놓아주며 친밀함과 거리 사이의 균형을 지켜온 듯하다. 아내 역시 그와 보조를 잘 맞춰 왔기에 건강하고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결혼식 (Photo courtesy of Shinbeom Kang)

기자: 부부 사이에 갈등은 없으세요?

많은 여자들이 기념일이나 생일에 알아봐 주길 원하잖아요. 그 마음을 이해해요. 근데 남자들은 바쁘다 보니 놓치는 거예요. 그럼 싸우는 거죠. 저는 아내한테 미리 말해 달라고 했어요. 알아서 해 주겠지 하고 두고 보다가 열받는 게 어리석은 거예요. 미리 알려주면 선물도 받고, 저는 준비할 시간이 생기잖아요. 제 아내는 훈련이 잘 돼서 달력에 동그라미 쳐 놓고 받을 거 다 받아냅니다. 얼마나 현명합니까.

그리고 서로 주려고 해 보세요. 서로 달라고 해서 하나씩 받으나, 서로 주려고 해서 하나씩 받으나 결과는 똑같은데, 이왕이면 서로 주려고 하는 게 훨씬 좋잖아요. 서로 요구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저는 아내한테 요구하는 게 없어요. 밥 안 해 주면 제가 해 먹고, 청소도 제가 하고. 기대를 안 하니까 불만이 없습니다.

심지어 아내랑 여행을 가면 저는 봉사하러 간다고 생각해요. 여행의 목적이 즐기러 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봉사예요. 아내가 하자는 대로 뭐든지 따릅니다. 평소에 제 마음대로 사는 시간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까 여행만큼은 아내 뜻에 다 맞추는 거죠.

밖에서는 누구보다 자기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지만, 아내 앞에서는 봉사자가 된다고 했다. 40년 가까이 곁에 있어 준 사람에 대한 마음이 그의 말 속에서 진하게 묻어 나왔다.


그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았다

기자: 어떤 아버지세요?

사업하느라 바빴지만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둔 건 아니에요. 애들 어릴 때에는 가게 문 닫고 토요일 저녁에 올랜도로 밤새 운전해서 갔습니다. 새벽에 도착해서 디즈니월드 하루 종일 보내고, 또 밤새 운전해서 월요일 아침에 출근했지요. 돈이 없을 때는 카드 써 가며 데려갔어요. 돈은 갚으면 되지만 아이들은 시기가 있으니까요. 애들이 다 커서 부모랑 디즈니월드에 갈 일 있습니까?

그래서 애들 중학교 때는 방학을 이용해서 두 달 동안 차를 타고 전국 일주를 했어요. 내셔널 파크 웬만한 곳은 다 가 봤어요. 가족 넷이서 24시간 붙어 다닌 거죠. 그때 아이들한테 말했어요.

“아빠는 이제 너희들이랑 할 얘기 다 했다.”

2026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행사에 참석한 강신범 대표
(Photo courtesy of Shinbeom Kang)

기자: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하셨어요?

착하게 살아라, 공부해라. 그 말 한 번도 안 했어요. 학교에서도 하고 교회에서도 하는 말을 집에서 또 하면 스트레스만 쌓이는 거예요. 제가 가르친 건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것들이에요. 블랙잭도 가르쳤고, 술도 알게 해 줬고, 게임도 같이 했어요.

한 번은 애들이 해외 출장 가서 블랙잭 자리에 끼었는데, 너무 잘해서 같이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대요.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했더니 더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애들이 커서 한 말이 있어요. “우리 아빠는 맨날 풀어주고 쉬게 해 준 아빠였다”고. 그 말이 제일 좋았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것을 자식에게 주려 했다. 잔소리 대신 자유를, 훈계 대신 경험을. 자녀들은 부모와 보낸 시간의 양보다 질을 더 오래 기억한다.


결국, 사람이다

그의 시선은 사업 바깥으로도 향한다. 한인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공동체 안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 커뮤니티의 도움과 지지가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애틀랜타 한인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강신범 대표(Photo:Atlanta K Media)

기자:한인타운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고 계시잖아요?

한인회 일이든 코리안페스티벌 운영하는 일이든 저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써야 해서 하는 것일 뿐이에요.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체험하고 배운 것들이 있잖아요. 사업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빅데이터가 쌓이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떤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해서 성과를 내는 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기자: 달란트 말고 리더십의 동력이 있다면요?

사람들이죠. 제 카카오톡 친구가 4,300명이에요. 그냥 모은 게 아니고 밥 사고, 술 사고, 필요하면 도와주고, 수십 년을 그렇게 쌓은 거예요.

사람들은 제가 맨날 술 먹고 논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게 다 일이에요. 수십 년 동안 만나온 그 인맥들이 지금 제 사업과 제가 운영하는 프로젝트를 움직이는 진짜 힘이에요. 저한테 지금 뭔가 일이 생기면 전화 한 통으로 30명이 움직여요. 사람들과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가 없으면 혼자일 뿐입니다.


이지저지

기자: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고생하신 적은 없으세요?

예전에는 속도 상하고 스트레스도 받았는데 살면서 겪어 보니까 사람들은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욕을 하더라고요. 그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제가 철학적으로다가 사자성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지저지’,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이라는 뜻이에요.

일찍 집에 들어오면 “친구도 없냐”고 해요. 늦게 들어오면 “왜 이렇게 늦냐”고 해요. 술 마시고 사람 만나면 “놀 줄만 안다”고 해요. 안 마시고 가만히 있으면 “왜 이리 재미없냐”고 해요. 이래도 저래도 불만이에요.

그걸 깨닫고 나서 스트레스를 안 받게 됐어요. 어차피 시비 거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도 시비를 걸어요. 그래서 저도 말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해요. 사람 자체가 이지저지인데,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저도 이제 그럴 만한 나이가 된 거죠. 하하.

‘이지저지’, 그의 삶은 남 눈치 보느라 주저하는 이들에게 묘하게 유쾌한 해방감을 남긴다.


그만의 몸 달래기

기자: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내가 술을 그렇게 먹는데 9월이 되면 한 달 동안 술을 딱 끊습니다. 20년 넘게 지켜온 철칙이에요. 간은 살아나기 때문에 이렇게 휴식기를 주는 거예요. 나머지 11개월 동안 잘 먹기 위해서 간을 보살피는 거죠. 그래서 제가 배는 좀 나왔지만 지방간도 없고 건강합니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예요. 의사들이 운동하라, 좋은 거 먹으라, 술 끊으라 하는데, 그 말 들은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운동이 진짜 즐거운 사람은 10%도 안 된대요. 나머지 90%는 억지로 하다가 스트레스 받고 오히려 더 아프다고요.

그래서 저는 먹고 싶은 거 먹고, 마시고 싶은 거 마셔요. 대신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기면 바로 병원 가서 조치합니다. 병을 키우는 게 제일 나쁘니까요. 1년에 서너 번씩 건강검진 받고, 약이 필요하면 즉시 먹습니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몸이 안다니까요.


경험을 나누는 탐험가

기자: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올 초에 뉴저지 가서 프랜차이즈 오너들 모시고 세미나를 진행했어요. 끝나고 한 청년이 오더니 “사장님, MBA 어디서 하셨어요?” 하고 묻는 거예요. 대학도 못 나왔는데 경영학 석사를 내가 어디서 하겠냐고 했더니, 본인이 MBA 출신인데 제가 가르쳐 준 내용이 거기 다 있다는 거예요. 이후에도 여러 명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어요. 결국 MBA라는 게 경영에 대한 경험이겠구나 싶더라고요.

40년간의 비즈니스 경험과 사회 경험이 철학과 이론을 만들어내는 수준까지 왔구나 싶으니까, 이제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강연이나 컨설팅을 하면서 다른 분들도 성공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고 해요. 제 이야기는 책에서 배운 게 아니라 몸소 겪은 경험들이니까요.

NASCAR에 메인 스폰서로 공식 진출한 WNB 팩토리
(Photo: Atlanta K Media)

세상은 교과서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에요. 요즘 애들한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가르치면 안 돼요. 욕심과 목표를 갖고 돈 벌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줘야죠. 모두가 차세대 육성을 얘기하면서 정작 성공의 비법은 말 안 해줘요. 차세대가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먼저 이 길을 걸어온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진짜 제 꿈은 오지 탐험가예요. 어릴 때부터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보면서 꿈꿔 왔죠. 저희 가족들도 다 알아요. 제가 사업 내려놓는 날, 바로 떠날 겁니다.

고등학교 시절 교회 수양회에서 여장한 강신범 대표를 찾아보세요.
(Photo courtesy of Shinbeom Kang)

열일곱에 여동생들 손을 잡고 세상에 홀로 섰던 소년은, 이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음 세대에게 내어주려 한다. 300불로 시작해서 미국 전역에 브랜드를 세우고 있는 사람. 그 여정보다 더 긴 꿈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다. 오지 어딘가에서 인디아나 존스처럼, 그에게는 일상이 이미 모험이다.

By Eunic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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