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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대로 다 타시오

고백, 45년 동행의 끝에서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남겨진 사람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까.

선우인호. 그를 소개하는 말은 간단하다. 조지아텍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엔지니어 출신, 40년 가까이 애틀랜타에서 살아온 이민 1세대, 커머셜 보험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그러나 이 모든 이력은 올해 1월, 한순간에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되지 못했다. 45년을 함께한 아내가 떠났다.

첫 인사를 나누고 녹음기를 켜기도 전, 그는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질문은 필요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해야만 하는 말이 그의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아빠와 아들, 단둘이 떠난 여행

아버지들이 아들과 단둘이 여행을 다녀오는 일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그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꺼낸 이야기는 거창한 성공담도, 인생 철학도 아닌 아들과의 여행이었다.

둘째 아들이 러프한 하이스쿨 시절을 보냈더랬습니다. 아내가 “바람 좀 쐬고 오라”며 저와 둘째를 스페인·포르투갈 12일 패키지 여행에 강제로 등록시켰죠.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아버지들이 아들과 단둘이 여행 온 저를 얼마나 부러워하든지요. 남자들은 보통 자기 아들과 여행 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비록 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저 묵묵히 함께 구경 다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둘째의 방황

지금 생각하면 부모로서 잘못된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2004년, 둘째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그저 학군이 좋다는 이유로 알파레타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은 98%가 백인이었습니다. 함께 자란 친구 하나 없는 낯선 환경에서 둘째는 결국 적응하지 못했고, 학교를 옮겨 다니며 긴 방황의 터널을 지나야 했어요. 턱걸이로 졸업장을 따고 나서야 뒤늦게 철이 든 녀석을 보면, 한창 예민할 때 저희 부부가 바쁘게 일한답시고 아이의 마음을 세심히 살펴주지 못한 것 같아 늘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게 아파옵니다.

해결사 형, 기다림을 믿는 동생

10년 터울인 큰애는 동생과는 성향이 아주 달랐습니다. 5학년 때부터 보딩 스쿨을 다니며 학교생활을 즐겼고, 지금은 명문대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죠. 그래서인지 둘째는 형만 보면 주눅이 들어 지금도 슬슬 피하곤 합니다. 큰애는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이걸 풀려면 이렇게 해야 돼!”라며 정답부터 찾는 해결사 타입이고, 동생은 “시간이 지나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고 믿는 타입이에요. 비록 남들보다 시작은 조금 늦었지만, 이제는 신발 스토어 매니저로 제 몫을 다하며 내년 10월에 결혼까지 하겠다는 둘째가 짠하면서도 고맙죠.

첫손주 탄생의 기쁨 /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한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이지만 성향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말 속에는 스스로 잘 커준 첫째에 대한 대견함과, 조금 늦었지만 자신의 몫을 다해 살아가는 둘째에 대한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묻어났다. 자식을 키워 본 부모라면 이해가 가는 마음. ‘아픈 손가락’이라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


쿨한 ‘복부인’ 어머니

기자: 선우인호의 어린 시절 이야기 들려주세요.

저는 서울에서 쭉 자랐는데, 어린 시절 정말 알아주는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여학생들 고무줄 툭 끊고 도망다니는 게 일상이었죠.

저희 어머니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참 독특한 분이셨어요. 일명 ‘복부인’이셨거든요. 보통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학교 마치고 오면 집에서 밥을 해 주며 기다리시지만, 저는 어머니가 해 주신 밥을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트라우마가 있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 그냥 어머니께서 아들 밥 차려 주는 대신 밖으로 부지런히 다니시며 소셜 활동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셨던 것뿐이니까요.

당시 아버지가 동네에서 의원을 운영하셨는데, 저는 그 덕분에 의원에 상주하던 간호사 누나, 식모 누나와 셋이서 어울려 밥 먹고 놀며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님과 꼬마 선우인호 /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나한테 누나가 있었나?”

제 인생의 첫 번째 반전은 1971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집안을 대청소하시더니 미국에서 누나가 온다는 겁니다. 저는 깜짝 놀랐죠. “에잉, 누나라니요? 나한테 누나가 있었나?” 저는 그때까지 제가 외아들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그해 여름방학에 누나가 조카 둘과 매형을 데리고 나타난 거예요. 어린 나이였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산수를 해 봐도 계산이 맞지 않았습니다. 누나의 나이를 따져보니 엄마 아버지가 도대체 몇 살 때 결혼해서 낳았다는 건지 물음표만 가득했죠. 하지만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진 않았습니다. 부모님 사정이야 어찌 됐든, 저는 같이 놀 가족이 생겨서 마냥 좋았으니까요.

부모님, 누님 가족과 함께 /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평양 양조장과 38선

시간이 흘러 철이 들고서야 부모님이 제가 상처받을까 봐 재혼 사실을 숨기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두 분의 삶이 참 파란만장했더군요.

아버지는 1913년생, 어머니는 1916년생으로 두 분 다 평양 출신이십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기 전 평양에서 이미 결혼해 삼남 일녀를 두셨죠. 할아버지가 당시 부의 상징인 양조장을 운영하셨는데,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할아버지는 첫째 아들만 남겨두고 둘째와 막내인 저희 아버지에게 “잠시 몸을 피해 있으라”고 하셨답니다.

그렇게 형제 둘이서 덜렁덜렁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 길로 38선이 막히고 6·25가 터지면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이산가족이 되어 버린 겁니다.

아버지와 어린 선우인호 /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나비하고나 살아라!”

어머니의 과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여고를 졸업하신 어머니의 첫 번째 결혼 상대는 그 유명한 한국의 파브르 ‘나비 박사’ 석주명 씨였어요. 집안 중매로 얼굴도 못 보고 시집을 가신 거죠. 그런데 이분이 공부만 하셔서 도대체 나비밖에 모르셨던 거라… 애를 어떻게 낳았는지도 모르셨대요.

훤칠한 키의 미인이자 당대 최고의 신여성이었던 어머니와 달리, 석 박사님은 퇴근 후에도 매일 10시간씩 나비 연구에만 매달리며 가정에는 전혀 무관심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결혼생활 못 하겠다, 나비하고나 살아라!” 1938년에 생과부 생활을 청산하고 이혼을 선언하신 거죠. 당시 ‘신여성의 이혼’이라며 신문에도 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답니다.

이혼 전 석주명-김윤옥(선우인호씨 어머니)/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그렇게 홀몸이 된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한에서 어찌어찌 만나 가정을 꾸리신 겁니다. 결혼하실 때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니 애는 낳지 말자”고 약속하셨다는데, 그 약속을 깨고 세상에 나온 게 바로 저예요. 하늘의 뜻이었던 거죠.

역사책에 이름 한 줄 남긴 나비 박사의 이혼과, 평양에서 남으로 내려온 양조장집 둘째 아들. 두 사람의 상처가 만난 자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에게 생은 처음부터 ‘약속을 깨고 얻은 선물’이었다.

청계천에 버려진 나비 박사

지금도 어바인에 살며 저와 연락하는 90세 누님은 제게 정말 각별한 분입니다. 누님의 친아버지인 석주명 박사님은 너무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셨어요. 어느 날 나비를 관찰하러 청계천을 지나가시다 서북청년단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을 걸자 투박한 평양 사투리로 대답하셨답니다. 그걸 듣고 “너 공산당이지?”라며 그 자리에서 총을 쏴 죽인 거예요. 그리고는 시신을 청계천 근처에 던져 버렸답니다. 누님은 그 충격으로 “한국에 살기 싫다”며 미국으로 떠나 정말 악착같이 공부했습니다.

누님이 보여준 웨슬리안 대학교 졸업 사진이 생각나네요. 졸업생 100명 중 99명이 백인이고 딱 한 명의 동양인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누님이었습니다. 위스콘신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노던 일리노이 대학교 의상학과 교수를 지내셨죠. 매형도 같은 학교에서 교수를 하셨어요. 1960~70년대에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교수가 되신 분들이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지요.


바퀴벌레의 환영 인사

기자: 미국에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1981년 병역을 마친 뒤,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린 아내를 데리고 1982년 누님이 계신 곳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1986년 조지아텍 박사 과정을 위해 애틀랜타로 왔는데, 그 사이 태어난 큰아이까지 세 식구의 짐을 차 한 대에 꽉꽉 싣고 내려왔어요. 그때가 I-85와 I-285 만나는 스파게티 정션 공사를 시작할 때였죠.

황혼 무렵에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대충 옮기고 침대만 조립하고는 피곤해서 뻗어 버렸어요. 그날 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부엌 불을 켰는데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고 착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해서 다시 불을 껐다 켰더니 그 울렁거린 게 몽땅 바퀴벌레 떼들이었어요. 갑자기 밝아지니까 도망도 못 가고 카페트 속으로 머리를 박는데 살면서 그런 광경을 처음 봤어요. 학교 하우징 오피스에서 추천해 준 가장 가까운 아파트였는데 한 달 렌트비가 170불 정도였거든요.

다음 날 새벽 6시, 아내에게 이유도 묻지 말라며 짐을 다시 싣고 하우징 오피스로 달려가 “내 건강이 위협받고 트라우마가 생겼다”며 단판을 지어 레노베이션 중인 다른 아파트를 얻어냈습니다.

음악을 내려놓은 음악 교사

한국에서 음악 교사였던 아내는 미국에 오자마자 “음악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누님의 현실적인 조언을 받아들였어요. 누님이 저와 20살 차이가 나니까 아내가 누님을 시어머니처럼 생각했는데 누님이 “미국에서는 먹고살 일을 해야 돼”라고 하셨죠. 아내는 저의 학업을 위해 전기회사 단순 용접 같은 노동부터 식품점 캐시어, 쥬얼리숍 카운터까지 가리지 않고 일하며 저를 뒷바라지 해줬어요.

젊은 시절 선우인호-선우미숙 부부 /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박사 자격시험, 두 번의 낙방

기계공학 박사 과정 중에는 새벽 2~4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한국인들의 치열함을 몸소 겪었습니다. 당시 부산 시장 서병수 씨나 론스타의 변양호 씨 같은 쟁쟁한 분들과 함께 공부했어요. 학자들은 뇌 구조가 좀 다른데 저는 실력이 없었던 거죠. 박사 과정 자격시험에서 두 번 낙방한 후, 더 낮은 대학에서 학위를 따는 것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게 낫다는 매형의 조언에 따라 취업을 결심했습니다. 애틀랜타의 중소 환경 기업에 입사하게 됐어요.

동양인의 미국 시골 출장길

당시 공립학교 건물 등에 쓰인 위험 물질인 석면을 조사하기 위해 조지아주 전역의 학교들을 다녔습니다. 석면 가루가 폐에 들어가면 폐가 시멘트처럼 굳는 ‘메소텔리오마(Mesothelioma)’라는 병을 유발하거든요.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조지아 미들 지역의 작은 마을들에는 동양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인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영화 ‘보난자’에서나 동양인을 봤기에 저를 보고 신기해했죠. 어린아이들은 나를 막 만져 보려고 했었어요.

한 번은 조지아주 캔턴(Canton) 시청에 업무차 방문했는데, 시 경계 표지판 밑에 “밤 10시 이후 유색인종(Colored People)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문구와 함께 총알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목격할 정도로 인종차별이 노골적이던 시대였습니다. 스톤 마운틴에서는 KKK가 집회를 열기도 했었으니까요.

차별의 그늘 속에서도 인상 깊었던 장면은 장례 행렬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였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예우를 표하는 이들과, 목화밭에서 일하다 말고 모자를 벗어 묵념하던 흑인들의 모습은 영화처럼 경건한 감동을 주었죠.

차별과 경건함이 공존하던 남부. 총알 자국이 새겨진 표지판 앞에서 그는 이방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몸으로 배웠고, 목화밭의 흑인들이 벗은 모자에서 인간의 품위가 어디서 오는지를 보았다.

초대받지 못한 술자리

저는 미국 직장인들은 금요일 오후면 모두 가족과 시간을 보내러 일찍 퇴근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백인 동료들끼리 금요일마다 펍(Pub)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어울리는 ‘이너 서클(Inner Circle)’이 따로 있었더라고요. 그런 친목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3년 동안 몰랐습니다. 결국 저보다 늦게 들어온 미국인 동료가 제 매니저가 되는 모습을 보며, 특별한 노하우나 정치력 없이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업계에서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쿡북 엔지니어(Cookbook Engineer)’라고 부르거든요? 매뉴얼만 숙달하면 대체할 수 있는 자리였죠. 저는 언젠가 닥칠 해고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3년 만에 쫄딱 망한 옷 장사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무엇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어요. 근데 제가 좀 엉뚱한 데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백인 옷 장사가 하나 나왔다는 말을 듣고 “그래, 한번 해 보자” 하고 덜컥 시작한 거예요. 결과는 3년 만에 쫄딱 망했습니다.

그때 제게 가게를 파신 분이 지금 프라미스원 뱅크의 대주주이신 분인데, 그분은 참 성실한 분이셨어요. 보통 가게를 팔면 금방 손을 떼기 마련인데, 그분은 제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끝까지 저를 봐 주셨습니다. 한 달에 두 번씩 저를 데리고 LA 자바 시장에 물건을 하러 가셨어요. 흑인 물건과 백인 물건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데, 저를 옆에 끼고 “이거 사, 저거 사” 하며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죠.

처음에는 돈 1만 불을 만져 보며 “이거 잘하면 부자 되겠다” 싶어 신이 났습니다. 하지만 3년 차가 되니 리테일 비즈니스의 무서움을 알겠더라고요. 바로 재고 문제였습니다. 백인 손님들은 리턴을 많이 하는데, 그게 다 재고로 남으면 결국 ‘걸레’가 되어버려요. 흑인 시장처럼 싸게라도 처분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거든요. 재고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박사도 엔지니어도 옷 장사도 그의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실패의 모양만큼 단단해진다. 쫄딱 망한 3년이 그에게 남긴 것은 빚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100-25-4의 법칙

기자: 지금 하고 계신 보험 일은 언제 시작하게 되신 거죠?

1994년부터 올스테이트 보험을 시작해 자리를 잡아가던 아내의 권유로 저 또한 보험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어요. 옷 장사를 정리하고 뛰어든 곳은 ‘센트리(Sentry)’라는 미국 보험회사였습니다. 거기서 저를 트레이닝시켜 준 유대인 매니저를 저는 지금도 존경합니다. 그분은 제게 보험 영업의 기본을 아주 혹독하게 가르쳐 주셨어요.

월, 수, 금요일은 무조건 차를 타고 나가서 명함을 돌리는 ‘필드 데이(Field Day)’였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으면 “아무 데나 가라(Anywhere you want)”고 했죠. 그렇게 무작정 가게들을 돌며 ‘콜드콜(Cold Call)’을 시작했습니다. 세탁소 같은 데 들어가면 바빠 죽겠는데 웬 동양인이 들어오니 눈길도 안 줍니다.

그때 배운 확률이 바로 ‘100-25-4’입니다. 사무실 100군데를 들어가면 명함을 받아주는 사람이 25명이고, 그 25명 중 딱 4명만이 제 손님이 된다는 법칙이죠. 이 4명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8명이 되고 복리로 늘어나는 거예요. 이 법칙을 믿고 발로 뛴 결과, 저는 입사 첫해에 전 미주 ‘루키 오브 더 이어(Rookie of the Year)’가 되었죠.

엔지니어의 눈으로 건물을 읽다

저는 집이나 자동차 보험 같은 퍼스널 보험은 재미없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데이터를 넣으면 답이 딱 나오는 그런 것보다, 복잡한 공장이나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다루는 커머셜 보험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때 제 엔지니어링 백그라운드가 큰 힘이 됐습니다. 건물을 딱 보면 스펙이 보입니다. 파이프라인이 어디로 가는지, 에어컨 시스템이 어디 있는지, 기계를 얼마나 돌려야 온도가 유지되는지 계산이 나오거든요.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들 한다. 박사 자격시험을 두 번 떨어뜨렸던 기계공학 지식이 20년 후 커머셜 보험 시장에서 그의 무기가 되리라고는, 그때의 그도 몰랐을 것이다.

유체이탈 화법

세일즈를 하다 보면 “나가라”는 소리도 못 듣고 아예 유령 취급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제가 쓴 방법이 바로 ‘유체이탈 화법’입니다. 제 감정을 분리해 버리는 거죠. 눈 한 번 안 마주쳐 주는 주인 옆에서 3~4분 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음에 오겠습니다” 하고 나오는 생활이 반복됐습니다. 하지만 10번의 거절을 당해도 1번의 수락을 받았을 때의 그 짜릿함이 그 모든 상처를 다 잊게 해 주더라고요. 그 맛에 보험 영업을 지금까지 해 온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경험은 하나도 없더라고요.

사자의 사냥법

당시 지역 세탁소가 500~600개 정도 있었는데, 그중 무려 400곳이 제 손님이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대단한 성공이었겠지만, 사실 그 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어요. 어느 정도 정상에 올라와 소개(Referral)만으로 영업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영업사원 특유의 ‘치열함’을 잃게 되거든요.

이건 사자의 사냥과도 비슷합니다. 사자는 가만히 서서 “나 좀 잡아먹어 주세요” 하는 먹잇감에는 관심이 없어요.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놈을 끝까지 쫓아가서 낚아챌 때 진정한 야성이 발현되는 법이죠. 그런데 성공에 취해 필드에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그저 전화 벨소리만 기다리고 있다면, 그건 이미 영업의 함정에 빠진 셈입니다. 저는 여전히 인간이 하는 비즈니스의 본질은 ‘페이스 투 페이스(Face to Face)’에 있다고 믿습니다.


주일학교 꼬맹이 누나

기자: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집사람은 1960년대 성북교회 주일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아주 오래된 인연입니다. 저보다 4개월 먼저 태어난 ‘누나’였던 탓에, 어린 시절 맨날 “누나 누나” 하고 부르며 짓궂게 놀려대곤 했지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며 계속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 사실 연애라고 하기 전부터 제 삶의 모든 순간에 아내가 있었던 셈이죠.

뭐 어렸으니까 ‘이 여자와 결혼해야지’, ‘이 남자와 결혼해야지’라는 거창한 생각은 없었지만, ‘퍼피 러브(puppy love)’라고 하잖아요.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도 다른 남자애와 이야기하는 모습 보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고 따끔거렸던, 그 풋풋한 질투가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벙어리 장갑, 그리고 악보 한 장

가장 설레던 기억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습니다. 종로 2가 YMCA 학원을 같이 다녔는데, 눈비가 섞여 내려 유독 춥던 어느 날이었죠. 그녀가 수줍게 다가오더니 직접 뜬 벙어리 장갑과 종이 한 장을 내밀더군요.

“이게 뭐야?” 하고 물으니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 악보라며 건네주는데, 뭐랄까 심장이 간질간질거렸다고 해야 하나 평소와 달랐죠. 손을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장갑 사이즈는 저한테 좀 작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요.

악보를 보니 이은상 시인의 가곡 ‘사랑’이었어요. “탈 대로 다 타시오, 애타게 타지 마시오”라는 가사를 보며 ‘아, 얘가 날 좋아하는구나’ 하고 확신했지요. 그 추운 겨울, 종로 거리가 세상 따뜻한 장소로 변하더라고요.

Image generated by AI / The InnerView

2분 만에 끝난 면접

보통 남자들이 장인어른한테 결혼 승낙 받으러 갈 때 엄청 긴장하잖아요. 저도 그랬죠. 그런데 “한 번 데려와 봐라” 하신 장인어른이 저를 보시곤 “잘 살게!” 딱 한마디로 상황을 끝내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니 장인어른이 저희 아버지 해군 후배셨던 겁니다. 또 저희 아버지가 동네에서 의원을 오래 하셨으니까요. 그 바람에 면접이 단 2분 만에 끝나 버렸죠.

어머니의 한 수

대학교 때 교제를 이어가던 중, 저희 어머니가 승부수를 던지셨습니다.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낼 계획을 세우시면서 “저 녀석 마음이 변하기 전에 한국에서 결혼부터 시켜야겠다”고 찍으신 거죠. 여자 쪽에서도 확실한 약속이 있어야 따라올 수 있을 테니, 일종의 ‘마음의 바인딩’을 하신 셈입니다. 결국 저희는 늘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죠.

1982 8월 10일 미국 가기전 마지막 사진/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미국 생활 한 지 어느덧 44년째로 접어든 올해 1월. 그는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겪어야 했다. 여느 평일 저녁과 다를 게 없었던 밤, 자다 깨서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던 아내는 끝내 침대 옆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밤, 아이패드 보던 아내

화요일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화요일.

밤 10시 반쯤이었어요. 친구랑 저녁 먹고 들어온 아내가 침대에 누워 아이패드를 보고 있더라고요. 예전에 그러다 졸아서 아이패드를 얼굴에 떨어뜨려 코가 깨질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또 떨어뜨리지 마라, 코 깨진다.” 그렇게 핀잔을 주고 저도 잠들었죠.

그게 제가 아내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새벽 초반에 한 번 깼어요. 옆자리가 비어 있더라고요. 아, 화장실 갔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아내가 제 옆에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44년 동안 한 침대에서 자면서 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니까. 당연히 돌아올 사람이었으니까.

소파에 엎드려 있던 사람

새벽 6시가 됐는데도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소파에서 잠들었나. 그런 적이 종종 있었거든요.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습니다.

아내가 소파에 엎드려 있었어요. 소파 위에 토를 한 채로.

몸을 흔들어 봐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911을 불렀습니다. 노스사이드 병원으로 실려 가는 동안 제 머릿속은 정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사람이 그런 순간에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몸이 움직일 뿐이죠.

오후 5시쯤 CT 결과가 나왔습니다. 의사가 저를 보며 말했어요.

“She is brain dead.”

뇌출혈이었습니다. 아마 자다가 머리가 아파서 깼는데, 혼자 애드빌 먹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펑’ 한 것 같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질 것 같아도, 옆 사람 잠 깨우는 게 미안했던 모양이에요.

“It’s your call.”

병원에서 의사인 큰애한테 물었습니다.

아빠: What’s the next step? (이제 어떻게 해야 해?)

큰아들: You have two ways. A and B. (A와 B 두 가지 길이 있어.)

아빠: What is A? (A는 뭔데?)

큰아들: 인공호흡 장치로 엄마의 생명을 연장하는 거지.

아빠: 언제까지?

큰아들: 죽을 때까지. 평생 인공호흡기 달고 목에 구멍 뚫어서 음식 넣고. A는 엄마도 원하지 않을 거고, 아빠도 간병하기 몹시 힘들 거야.

아빠: 살아날 가능성은?

큰아들: 없어.

아빠: What’s the other one? (B는 뭐야?)

큰아들: Let her go. (보내드리는 거지.)

아빠: 인공호흡기 떼는 거야? 그걸 누가 해?

큰아들: It’s your call. (아빠 몫이지.)

아빠: My call? (내 선택이라고?)

큰아들: Not mine. Not doctors. Your call. (응, 나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고 아빠가 결정해야 해.)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도저히 혼자 결정하기 힘들어 담임목사님과 상의 끝에 보내기로 했지요.

의사인 아들은 더 냉정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It’s your call.” 45년을 함께한 사람을 자기 손으로 보내야 하는 결정. 그 짐을 아버지의 어깨 위에 그대로 올려놓는 말. 아들도 그 순간 아버지 못지않게 무너지고 있었을 테다.

평온한 얼굴

인공호흡기를 아직 달고 있을 때, 아내의 귀에 대고 찬송가를 들려줬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 눈에 눈물이 조금 고이더라고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듣고 있었던 거예요. 45년을 함께 산 남편의 목소리를, 자기가 좋아하던 찬송가를, 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수요일 오후 5시쯤 인공호흡 장치를 뗐습니다. 제 평생 제일 어려운 결정이었죠.

장치를 떼고 10분 만에 아내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걸 보며 안도했습니다. 천사들이 데려가는 사람은 평온하다는데, 정말 평온하게 갔어요.

선우인호-선우미숙 부부 /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그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인터뷰 내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가늘게 떨리는 어깨 너머, 그의 슬픔이 이 공간에 가만히 차오르고 있었다. 어떤 말도 그 침묵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텅 빈 집, 영정 사진

기자: 사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나 없으면 저 철부지가 어떻게 살아가냐”라고 걱정해 주던 사람이었어요.

기자: 마지막 순간에 아내에게 들었던 가장 큰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땡큐… 고맙다…

그는 말하는 도중 울컥울컥 쏟아지는 눈물에 목메인 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텅 빈 집에 들어가면 이런 게 있어요. 영정 사진이 아직 그대로 있는데 그거 보면 화딱지가 날 때가 있습니다. ‘으이씨… 이렇게 나 혼자 두고… 어쩌라고…’ 물론 화나는 건 10, 고마운 게 90입니다만.

우리가 계획이 있었거든요. 그동안 너무 고생을 했어서 70이 되면 여행도 여기저기 가고 좀 쉬자… 그리고 새로 이사 갈 집도 짓고 있었어요. 아내가 새 집에다가 옵션도 많이 넣고 인테리어에도 정성을 쏟았는데…

아내와 노후를 함께 보낼 멋진 저택은 몇 달 뒤 완공된다. 드림하우스였던 그 집은 이제 혼자 처리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아내가 골랐던 벽 색깔, 아내가 고집했던 주방 구조, 아내가 그렸던 노후의 그림. 집은 완성되어 가는데 그 집에 함께 들어갈 사람은 이제 없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제가 항상 생각해 온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를 떠올렸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제 ‘생명책(Book of Life)’을 펼쳐 놓고 칭찬받을 행동을 한 게 무엇이 있나 돌아보게 될 텐데, 더 헌신하지 못한 것 같아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가서 “너 소자한테 물 한 그릇이라도 준 적이 있느냐?”, “돈 많은 사람 말고 외로운 사람 손 한 번 잡아본 적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겨울 뒤에 오는 봄

기자: 이 시간 어떻게 지나고 계세요?

4월 25일 되면 집사람 간 지 딱 3개월 돼요. 사람들이, 지금은 와이프 비즈니스 테이크오버해서 바쁘고 사람들이 밥 사주겠다고 만나자 해서 정신없이 보내겠지만, 그런 시간 이후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올 때면 가슴속에 숨겨 놨던 충격이 다 폭발할 거다… 라고 얘기들을 많이 해줍니다.

신상우 시인의 ‘인생’이란 곡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길고 길었던 겨울, 봄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견뎌내고 보니 어느덧 봄이더라.’ 지금은 막막하고 힘들지만 하나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반드시 다른 문을 여신다고 믿어요.

Image generated by AI / The InnerView

기자: 지금 다시 인생을 새로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먼저 떠나보낸 집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늙어 등 긁어주는 사람이 최고라…


아내를 떠나보낸 날, 그는 울지 않았다.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자녀들을 챙기고 장례를 치러야 하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는 담담히 아내의 마지막을 지켰다. 눈물은 그 뒤에 찾아왔다. 빈 침대를 마주한 밤마다, 영정 사진 앞을 지나는 새벽마다, 그리고 이렇게 낯선 이 앞에서 60년 전 벙어리 장갑 이야기를 꺼내다가 불쑥불쑥.

부부로서 함께 보낸 세월 45년. 그녀는 베스트 프렌드였고, 연인이었고, 아내였고, 엄마였고, 파트너였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종로 거리에서 소녀가 수줍게 건넸던 그 악보. 어쩌면 아내는 그 노래를 다시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홀로 남겨진 철부지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사랑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 타고 꺼질진대 아예 타지 마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있을 법은 하거니와

타다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작사: 이은상 / 작곡: 홍난파

아내가 건넨 그 노래의 가사처럼, 그는 45년을 온전히 타올랐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봄을 기다리는 것. 길고 길었던 겨울 뒤에, 견뎌내고 보면 어느덧 와 있을 그 봄을.

선우인호-선우미숙 부부 /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글. 이승은 (Eunice Lee) / InnerView. No.13 2026년 4월 22일

선우인호 대표 약력

교육 · 애틀랜타한국학교 최장수 교사·전 교장 / 동남부 한국학교 교장(4년) / NAKS 동남부지역협의회장 10년 연임(14~18대) / 애틀랜타 한국교육원 연계 프로그램 주도 / 36년간 한국학교 교사, 교장 재직, ‘3세 교육을 위한 2세 교육’ 정신으로 뿌리 교육 헌신

비즈니스 · 선우&선우 종합보험 대표(조지아주 둘루스) / 자동차·주택·사업체 맞춤형 보험 서비스 / 세미나·유튜브를 통한 너싱홈 메디케이드 등 실생활 보험 지식 전파

신앙·나눔 · 미주다일공동체 이사 / ‘천사기업’으로 밥퍼나눔운동본부 후원 / 해외교회 건축 선교 헌신

철학 ·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로 매 순간을 살아감 / 한국어 교육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주는 뿌리 교육 / 졸업생들이 한국말로 인사할 때 가장 큰 보람 / “우리의 잣대로 현지인의 삶을 판단하면 오만이 된다”

36년간 한국학교 교사와 교장으로 재직한 선우인호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
Photo courtesy of Mr. Inho So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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